이광섭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하는 평택시티 투어Ⅳ

 

문화유적지는 지역의 역사와 백성들의 삶이 응축되어 있는 곳입니다.

평택에는 국보급 문화재는 없지만, 크고 작은 많은 문화유적지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해도 30여 곳이 있습니다. 이번 문화유적지 해설 자료가 평택시민들에게 내가 살고 있는 평택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고,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기회에 평택의 문화유적지에 대한 시민들의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갖기 바라며, 이번에 알리지 못한 문화유적지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또 소개하고 해설하겠습니다.

일부 독자들은 이런 해설 자료들을 한데 묶어 시민과 학생들에게 교육 및 홍보용으로 배포하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평택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화유적지를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며 관광자원화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끝으로 이번 평택시티투어 문화유적지 해설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주신 시민신문사와 열독하시고 격려하여주신 독자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리며, 2017년 평택시티투어 문화유적지 해설을 마칩니다.

이번 해설지는 ‘진위향교’와 ‘홍학사 비각’입니다.

진위향교 전경(진위면 봉남리 언덕)

진위향교

진위향교는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에 있습니다. 봉남리는 근대이전만 해도 진위현의 읍치 즉 고을의 중심지였습니다.

봉남리는 뒤로는 무봉산이 있고 앞으로는 진위천이 흐르며, 기름진 넓은 평야가 있는 곳으로 지역 중심지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고을의 중심 읍치에는 관아, 향교, 객사가 있었으나 봉남리에는 현재 향교만 남아 있습니다. 지금의 진위면사무소 자리가 관아가 있던 곳이고, 진위초등학교가 있는 곳은 넓은 동헌의 뜰 이었다는 것을 학교의 북서쪽 담벼락에 관아의 초석이 남아 있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객사는 면사무소와 동부 마을 사이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졌고, 다만 대궐을 상징하는 궐패만 남아 진위향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럼 진위향교를 찾아가 볼까요.

진위향교에 도착하면 제일먼저 보이는 것이 선정비와 공적비들을 한데 모아 놓은 선정 비각입니다. 선정비는 그 마을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나, 선정을 베푼 현감들과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재산을 많이 내놓거나 덕을 베푼 사람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고을 백성들이 세운 비석입니다.

이곳에 있는 선정비와 공덕비들은 진위면이 근대화 되면서 관심 밖으로 밀려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거나 훼손된 것을 한데모아 놓은 것입니다.

특히, 송탄에 미공군기지가 들어오면서 부대 안에 있던 것이 이곳으로 옮겨온 것도 있습니다.

선정비각을 본 다음은 홍살문을 만나게 됩니다. 앞서 평택향교에서 설명하였듯이 홍살문을 세우는 것은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것으로 붉은 색은 악귀를 몰아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홍살문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면 급경사진 돌계단 위에 외삼문이 있습니다.

향교 바깥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문이3개 있는 데 가운데 문은 임금님이나 혼령이 드나드는 문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일반인들은 우측 문으로 들어갔다 나올 적에는 좌측 문으로 나옵니다.

외삼문을 지나면 수령이 250년이 지난 큰 회화 나무 2그루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사대부집이나 향교에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회화나무에 매달린 이슬을 맞으면 머리가 총명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화나무를 뒤로 하고 명륜당 앞에서 진위향교에 대한 전반적인 해설을 듣습니다.

‘진위향교는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지은 건물로 대지 면적이 좁고 경사가 심하여 외삼문과 명륜당이 일치하지 않으며, 동재와 서재도 좌우에 나란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진위향교는 태조7년 (1398)에 창건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가 인조 22년(1644년)에 당시 진위 현령 황종림이 명륜당을 중수하였으며, 고종 26년(1889년)에 전면적인 개보수를 실시하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곳 ‘명륜당’은 맹자의 ‘인간의 도리를 밝힌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가운데 대청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장소 즉 교실이며, 우측 방은 선생님이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며 좌측의 방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입니다.

명륜당의 양쪽에 보이는 건물은 동재와 서재로 학생들의 기거하던 곳으로 오늘날의 기숙사와 같은 곳입니다. 동재는 선배들이 사용하고 서재는 후배들이 기거하였으나, 신분질서가 강화된 조선 후기에는 동재에는 양반층이 서재에는 평민층 자녀들이 기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서재 옆에서 멀리 흐르는 진위천을 바라보면 정말로 진위향교가 있는 이곳이 최고의 명당 터임을 알 수 있습니다. 풍수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배산임수, 좌청룡우백호에 금계포란형 명당으로서 갖추어야 할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고 합니다. 멀리 펼쳐지는 진위천과 풍요로운 넓은 들판을 잠시 바라보고 휴식을 취하며 이제 내삼문을 지나 제사를 모시는 대성전으로 갑니다.

‘대성전’은 진위향교의 맨 위에 위치하고 있어 가파른 계단을 더 올라가 여기에서 지켜야 할 예절과 해설을 듣습니다.

‘진위향교의 대성전은 큰 건물은 아니지만 18세기 건축기법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제4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단층 맞배지붕을 하고 각의 기둥위에 덧붙이는 쇠서를 한 것이 특징입니다.’

우측계단을 통하여 제향공간인 대성전에 오르는데 여기에도 예의가 있습니다. 먼저 오른발을 한 계단 위에 올리고 왼발을 모으고 다시 오른발을 올리고 왼발을 들어서 모으며 올라갑니다. 이는 경건하고 엄숙한 공간에 들어갈 마음가짐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교육을 하는 곳 향교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 대성전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학의 독특한 성인관에 기초한 것으로 ‘누구든지 배워서 익히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의식에서 온 것입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와 유학을 계승 발전시킨 중국의 4성현과 우리나라의 유학자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향교에서 지내는 제례를 석전제라고 하는데 존경하는 성현들을 추모하기위해 드리는 제사 의식을 말합니다. 매년 봄. 가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에 석전대제를 올립니다.

 

홍학사비각과 무덤(팽성읍 본정리 꽃산언덕)

홍학사 비각

홍학사 비각은 팽성읍 본정리에 있습니다. 평택시내에서 계양가는 15번 버스를 타고 본정리 삼거리에서 내려 계성초등학교 가는 중간 쯤 에 있습니다. 정류장에서 내려서 400미터 위치의 꽃 산에 ‘홍학사 비각’과 ‘홍익한 선생의 묘’가 있습니다. 홍학사 비각 앞에서 홍익한 선생의 일생과 유적지의 해설을 듣습니다.

‘홍익한 선생의 묘와 비각이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942년에 홍익한 선생의 묘가 있는 곳에 일본군 부대가 들어오게 되어 묘를 이장하게 되는데, 당시 묘비 등 비석들은 그대로 방치되어 흙과 풀 속에 덮어져 방치되었던 것을 1964년에 마을 사람들이 비석의 귀중함을 알고 팽성읍 본정리 삼거리에 비각을 지어 안치하였습니다. 그러다 1982년에 본정리 삼거리가 복잡해지자 비각을 다시 선생의 묘 앞 현재의 장소로 이전 건립하여 현재에 이른 것입니다.

홍학사 비각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가 충절을 지키다 순절하신 삼학사의 한사람인 화포 홍익한 선생과 관련된 비를 보호하는 건물로 ‘포의각’이라고도 합니다. 포의각이란 ‘의리를 지키고 칭찬하며 널리 알린다.’뜻입니다.

홍학사 비각 안에 있는 신도비는 홍익한 선생이 돌아가신지 90년이 지난 1726년 (영조 2년)에 처음으로 세워졌는데 비문은 숙종시절 대학자이신 송시열선생께서 지으셨다고 합니다.

신도비의 글씨는 마멸되어 현재는 내용을 알아보기 어렵고 더구나 비각의 비문 23행중 왼쪽모서리가 깨어져 1행은 소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비각 안에 홍익한 선생의 묘표와 아들 홍수원의 묘표, 증손자 홍대의 묘표가 있으며, 상부에는 1964년의 비각 창건 사실을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다음은 포의각 뒤편에 홍익한 선생의 묘로 이동하여 참배하고 해설을 듣습니다.

‘홍익한 선생의 묘는 초혼장(시신 없이 혼을 불러 치르는 장례식)을 지내고 그가 심양에서 입고 있던 그의 의관만 돌아와 부인 양천 허씨와 함께 합장을 하였습니다. 그 후 그의 충성과 공적을 기리고자 신도비를 세운 것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모시고 오던 홍학사의 복장이 압록강을 건널 때 까지는 홍학사를 부르면 대답을 하였으나 압록강을 건너와서는 대답이 끊어져 이때 홍학사가 참사를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세간에는 홍학사의 집안을 오형문집이라고 하는데 이는 화포 홍익한선생이 심양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집안에 전해지자 부인, 아들, 딸, 며느리 모두가 자결을 했기 때문이라고 이곳의 홍학사 문중을 잘 아는 노인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 홍익한 선생은 어떤 분인지 알아볼까요?

‘홍익한 선생의 본관은 남양 홍씨로 호는 화포입니다.

선조 19년(1586년)에 현재 팽성읍 함정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후 서울의 마포에 있는 큰아버지 집에서 생활하면서 당시 큰 학자였던 월사 이정보 선생한테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의 나이 3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성균관에 들어가 39세에 인조 2년(1624년)에 공주행재정시문과에 장원급제 하여 관직에 들어가게 됩니다. 처음의 직책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강학원의 사서였으며 그 후 사헌부(감사원) 장령이 되었습니다.

1636년 청나라 태종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들어주지 않자 조선을 침략하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입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화친하자는 ‘주화파’로 의견이 갈려 있었습니다.

홍익한 선생은 척화파로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는 의견으로 결정되어 결국청나라 군대가 침략해 오자 전혀 대비가 없었던 조선 인조 임금은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갔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성내에 무기나 식량 등 모든 물자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자 결국 40여일 만에 조선은 항복하게 됩니다.

이때 청 태종은 인조 임금이 친히 삼전도에 나와 항복 할 것과 왕세자를 인질로 하고 척화파의 주모자와 백성들을 청나라로 끌고 가기로 하니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었습니다.

청태종은 그들이 억류하였던 세자,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인질로 하고, 척화론의 주모자인 삼학사와 수 만 명의 조선의 백성들을 심양으로 끌고 갔습니다.

중국 심양으로 끌려간 홍익한 선생은 청나라 태종의 신하가 되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백방으로 회유를 하고 극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그는 “온 세상 사람들이 형제는 될 수 있으나 천하에 아버지가 둘 있는 자식은 없다. 조선의 신하로서 내가 너의 나라를 황제국으로 부른다면 아버지가 둘 있는 자식이 되는 것이 아니냐. 내가 끝까지 버티고 싸우고자 함은 마땅히 신하된 직분일 뿐이다. 다만 이제 신하된 몸으로 위로 임금과 어버이가 계시는 데 모두 보호하여 안정하게 하지 못함이 죽도록 원통할 뿐이다.

더욱이 왕세자와 대군이 포로가 되었고 늙은 어머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니 어찌 대장부의 여한이 없겠느냐. 충효와 도리를 다하지 못한 죄 죽어야 옳을 뿐 용서받을 수 없으니 어서 목을 베어라. 죽어도 혼은 하늘을 날아가서 고국으로 돌아가 노닌다면 가슴이 시원하겠다. 이밖에는 다시 할 말이 없다. 오직 빨리 죽기만 원한다.” 라는 비장한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마침내 순절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충절을 찬양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나라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충정’이란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에 추증 하였습니다.

우리는 홍익한 선생의 충절과 그리고 옳다고 판단한 일은 끝까지 목숨까지 버리는 꿋꿋한 선비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 이번 호를 끝으로 평택시티 투어연재를 마무리합니다.

해설자료제공 _ 이광섭 평택시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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