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요는 민중의 소리, 국민의 소리, 우리 생활 속 소리”

“평택민요가 모두에게 노래와 놀이로 친숙해 질 수 있기를 희망”

팝송이나 가요를 좋아하던 또래와 달리 특이하게 민요가 좋았던 고등학생 어영애 씨. 지금 그녀는 평택민요보존회의 단장을 맡으며 평택민요를 대표하는 장인이 되었다.

민요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민요를 전공하지는 못했다. 당시 민요를 ‘천박한 음악’이라고 여기는 사회적 편견이 있었고, 이러한 맥락으로 ‘민요를 하면 결혼하지 못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어영애 단장은 “민요는 원래 민중의 소리, 국민의 소리, 우리 생활 속 소리였어요.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민요가 금기시 됐고, 그 당시 민요는 뒷골목으로 쫓겨나야 했죠. 이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민요가 뒷골목 음악, 천박한 음악이라고 여겼던 것 같아요”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소녀 어영애 씨는 민요를 가슴 한 편에만 남겨 두었다.

어 단장이 민요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그녀 나이 32세 때였다. 서울의 진로문화센터에 수지침을 배우러 갔다가 옆 교실에서 경기민요를 가르치는 것을 보고 그 강좌에 등록했다. 문화센터에서 민요를 배우는 과정에서 강사는 어 단장의 소질을 알아봤고, 자기 학원에 데리고 가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어영애 단장은 경기민요를 다방면으로 배우기 위해서 여러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사사했다.

그렇게 경기민요를 배울 때 ‘평택에도 민요가 있겠다’ 싶어 평택의 소리를 찾으러 다녔다. 어 단장은 “농한기나 농번기 때 평택의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예부터 내려오고 있는 민요를 조사했어요. 근데 어르신들이 후렴구는 알고는 있지만, 메기는 소리(앞소리)는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던 중 평택의 농요, 어업요, 장례요를 알고 있는 선생님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평택민요를 전수받았다.

이후에는 평택민요를 전국적으로 알리고 싶었다. 그녀는 “우리의 소리를 전국에 알리고 싶었고, 그래서 2006년에 80여 명의 어르신들과 평택호 근처 다리 밑에서 민요 연습을 하면서 대회를 준비했어요”라면서 “당시 지원을 받으면서 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르신들이 고생을 많이 했죠. 한 여름에 땀을 비 오듯이 쏟으시면서 어르신들이 함께 연습했어요”라고 전하며 당시 미안하고, 고마웠던 기억을 전했다.

어영애 단장과 당시 어르신들의 노력은 2007년 16회 경기도민속예술축제에서 2등에 입상하면서 빛이 났다. 이를 계기로 평택민요가 알려졌고, 2009년 3월에는 경기도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됐다. 어 단장은 “평택민요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당시 고생했던 어르신들 덕분”이라고 했다.

경기도무형문화재로 지정은 ‘평택 무형문화재 보존 및 지원 조례’에 의해 평택민요에 대한 평택시의 지원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평택민요 상임단원들이 육성되고, 연습공간이 마련됐다. 이후 평택민요보존회에서는 경기물류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어업요를 가르쳐 2014년에 경기도청소년민속예술축제 대회에 출전시켰고, 그곳에서 1등에 입상했다. 이듬해에는 전국청소년미술예술제에서 2등으로 입상하는 성과를 냈다. 최근에는 평택시민을 대상으로 민요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평택민요보존회에서 어영애 단장과 단원들은 매일 평택민요에 대해 공부하고, 공연을 위한 연습이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평택시민에게 평택민요를 알리고 싶어요. 평택인들이 적어도 평택민요의 후렴구라도 읊조릴 수 있고, 평택민요가 노래와 놀이로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또한 “평택 민요 전수관도 하루속히 지어져서 어린 아이들이 피아노부터 음악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리부터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길 바란다”고 했다.

한편, <평택시민신문>에 대해서는 “지역신문을 봐야 평택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평택시민신문>을 보고 있어요”라면서 “<평택시민신문>이 문화관련 소식을 많이 다뤘으면 좋겠어요. 문화인들의 이야기와 고충을 듣고, 관련 행사도 자주 소개해 주었으면 합니다”라는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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