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이 여유

김복순

시인·평택문인협회 회원

[평택시민신문] 좀처럼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 폭염의 여름이 슬며시 가을에게 바통을 넘겨준다 했더니 벌써 초겨울의 문턱을 넘고 있다. 돌이켜보면 요금 폭탄을 두려워하면서도 에어컨에 의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독한 여름이었다. 땡볕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호사라고 생각하지만 불앞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는 나도 덥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렇게 사람들과 대지를 푹푹 찌던 계절은 바뀌고 겨우살이를 준비해야 하는 지금, 마음이 또 바쁘다. 늘 분주하게 살아온 생활이다. 계획했던 것들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들도 많아서 계절의 변화에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요양원 벽화그리기에 동참했다. 안중현화고등학교 학생들과 문인협회회원들이 함께 시와 그림으로 낡은 벽을 도색하고 시를 써넣는 일이었는데 동참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가슴 설렘을 억누르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나와 내 가족이 아닌 타인을 위해 그것도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그리 기쁜 일인지도 모르고 산 것 같다. 자원봉사나 재능 기부는 생각은 쉬워도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가 않은 일이다. 한 때는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기 이전에 내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나 다하고자 했던 적도 있다. 타인에게 나의 임무를 전가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도 가졌었다. 내 주위부터 챙기면 된다는 생각이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사소한 일로 형제들과 등을 지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면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도 했었다.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내 삶이 그러했던 것 같다. 이제는 곁눈을 돌려 불우한 이웃이나 봉사를 필요로 하는 곳에 조금씩 나를 내어주고 싶다. 어려운 일에도 기꺼이 동참하는 자세로 살고 싶다. 함께 한다는 의미에 무게를 두고 싶다. 함께 한다는 일은 곧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겠다.

요양원현장으로 가는 날, 다른 날 보다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는 발걸음도 가볍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자 학생들은 오염되고 낡은 벽을 닦느라 분주하다. 건물이나 담장을 멋지게 변신 시키는 학생들의 표정이 해바라기처럼 환하다. 우리는 칠이 끝나면 시를 적기로 했는데 학생들과 함께 페인트칠을 했다. 의자를 오르내리며 조심조심 붓을 든 손에 정성을 다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크레파스와 도화지를 충분히 사 주셨으면 지금 화가가 됐을 거라는 농담을 섞으니 색을 먹은 벽이 환하게 웃는다. 여럿이 함께하니 그 힘의 위력은 대단하다. 시작하는가 싶었는데 그려진 나무에 꽃이 피고 벌과 나비와 새들이 올라앉는다. 어두웠던 벽이 늦가을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다. 봉사의 기쁨 중에 재능기부를 하면 더 없이 보람 있고 행복하다고 한 얘기가 생각이 난다. 내게 있는 재능으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글을 써서 노후엔 많은 봉사를 해야겠다는 다짐도 생긴다.

요양원 원장의 해맑은 웃음을 보면서 이런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라는 생각도 든다. 내 부모님도 모시지 못하는 현실인데 봉사정신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면 쉽지가 않을 것이다. 몸이 불편하신 내 부모님을 생각하니 이곳 생활을 얘기하시는 원장님의 얘기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언젠가 내가 거쳐 갈 곳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까지 숙연해진다. 일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낯선 학교교정을 찾아들었다. 마땅한 찻집을 찾을 수도 없었지만 다들 ‘학교’의 추억들을 만끽해보고 싶은 심리였을 것이다. 가을볕을 등에 얹고 정원의 원탁에 빙 둘러 앉아 준비해 온 차를 마시며 담소 나누는 시간을 즐겼다. 노란 은행잎과 색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나무들의 어우러진 풍경 속에 내 인생의 가을을 살며시 대입시켜 본다. 벽화와 시를 논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을 쯤 어디선가 “쿵!”하는 소리가 우리들의 시선을 모은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옆에서 지켜보던 모과나무가 큼직한 모과 하나를 던지며 존재를 알려온다. 튼실하고 향기로운 모과를 거두며 모과나무의 결실에 내 삶의 결실을 얹어보는 하루가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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