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여유

안 문(시인. 평택문인협회 회원)

[평택시민신문] 아이 둘이 어느 정도 자라 손이 덜 간다 싶을 때 아파트 근처에 핸드폰 공장이 들어섰다. 가까이 사는 주부들에게 시간제로 일이 주어지니 비슷한 또래의 애들을 가진 엄마들이 모여들었다. 아이들 학교 보내고 세탁기 돌려놓고 출근해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수다를 떨던 시절이었다. 점심시간이면 집에 가서 빨래를 널고 해가 질 무렵이면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왁자지껄 엄마를 부르던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전에 폴더폰의 부속들을 붙이고 맞추던 그때, 거의 15년 전에 누구의 엄마로 만나서 지금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여행계’라는 거창한 이름 붙이고 산다.

작년에는 1박2일로 경주에 다녀왔다 게스트하우스의 2층 침대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처럼 캔맥주를 홀짝이며 우정을 다졌는데, 올해는 서로 여러 가지 일이 있어 시간을 맞출 수가 없다. 멀리 가려고 계획을 세우니 서로 시간이 어긋나 미루다보니 1년이 다 지나간다. 그리하여 당일로 가까운 곳부터 돌아보기로 하고 택한 곳이 안성의 서운산 이었는데 운전하고 갈 사람이 전날 복통을 일으켜 더 가까운 고성산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평택에서 가까우니 휴일에 아이들과 자주 가던 곳이다. 아이들이 훌쩍 자라서 엄마와 어울리지 못한지가 한참이나 된 만큼 이 산을 찾은 지도 오랜만이다.

창진 휴게소에 주차를 하고 아줌마들 넷이서 산행을 시작한다. 산은 이미 고운 단풍을 앞세우고 등산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늦가을의 푸근함과 쓸쓸함이 교차되고 있다. 감동의 탄성을 지르며 새벽에 잠깐 뿌린 비로 촉촉하게 젖은 낙엽들을 밟으며 산길을 오른다. 물먹은 낙엽향이 코끝을 큼큼거리게 하고 나뭇잎들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거리는데 낮은 신음같은 비명이 절로 나온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 운동을 겸한 분위기다. 늘 하는 산책처럼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걷는다. 이렇게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이 내는 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가 있을까? 나뭇잎들의 속삭임이 들린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임을 새삼 깨닫는다.

고성산이 변화하고 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걸으면 각각이 길이 되어 중구난방으로 길을 만들어 산림이 많이 훼손되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푯말을 세우고 밧줄로 길을 막아 한길로 해서 계단이 만들어졌다. 오늘도 곳곳에 계단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고 이미 만들어진 계단도 엄청 많다. 새로 만들어진 계단에서는 페인트냄새가 얼굴을 찡그리게 하지만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며 기운을 내어 오른다. 298고지의 정상에서 사진도 몇 장 찍고 일행이 싸온 모싯잎 떡과 사과도 먹고 올해 거둬들인 늙은 호박과 대추를 끓여 내린 차도 한 잔씩 나누어 마신다.

안성 너른 들판에는 벼를 거두고 볏짚들을 모아 말아 놓은 것들이 곳곳에 보이고 비닐하우스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평택 쪽에는 고층의 아파트들과 가까운 물류센터의 건물 옥상이 넓은 들판처럼 펼쳐져있다. 약수터를 지나 운수암에 이른다. 조선 영조 때에 지어졌고 대원군의 친필현판이 걸려 있는 운수암은 몇 년 전 딸아이가 수능을 준비하고 원하는 대학의 합격 소식을 기다릴 때 마음을 졸이며 탑돌이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잠깐 타지에 혼자 나가 있는 딸 생각도 났지만 운수암 둘레를 한 바퀴 돌아보며 수북이 쌓인 빨간 단풍잎, 노란 은행잎으로 하트도 그리고 이름도 새기며 아이들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두어 시간이면 되는 거리인데 우리는 네 시간을 산속에서 보냈다. 대통령 하야라는 생소한 낱말들이나 튀어나오는 시끄러운 세상은 잠시 잊고 미세먼지 뿌연 도시의 공기도 멀리하고 산속에서 보낸 하루가 행복하다. 가까이에 이렇게 좋은 산이 있음을 감사하며 돌아오는 길은 장딴지에 알통이 생겼어도 좋기만 하다. 청설모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겨우살이 준비를 하는 산의 정취에 흠뻑 젖어본다. 고성산 전부를 내가 다 가진 것 같다. 늘 가까이에서 기다려주는 고성산, 다음산행을 기약하며 가슴 설레던 하루를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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