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씹어 먹는 아이’를 읽고

최은미 학부모(이충초)

아직 따뜻한 봄기운은 찾아오지 않고, 차디찬 칼바람이 남아있던 지난해 어느 날이었다. 나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송미경 작가를 처음 만났다. 여느 때처럼 딸애와 함께 장당도서관 어린이 열람실에 있었다. 평소 아이가 원하는 책을 읽어주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그날만큼은 아이가 혼자서 책을 고르는 시간이 길어졌고, 나는 그 틈을 타 어린이책 잡지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무심히 책장 어딘가를 펴고 글을 읽기 시작하는데, 그때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다. 다만 너무도 친숙하게 다가와 귓속말을 하는 탓에 듣지 않고 버틸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늘어놓았다. 게다가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이란, 남들이 듣기에 자랑거리가 될 만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어릴 적, 부모가 시골 조부모 댁에 버려두고 간 이야기, 그래서 하루 종일 부모가 찾아오길 기다린 이야기, 혼자서 놀고, 혼자서 생각한 이야기,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한 이야기, 그리고 그 어릴 적 기억이 어른이 된 자신을 늘 그 날로 되돌린다는 이야기.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감싸주고 토닥여주고 싶었다. 그가 바로 송미경 작가였다.

나는 어린이책 잡지에 실린 글을 읽고, 송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매달 동화 한 두 편을 소개하는 글이었는데 다른 작가들과 달리 송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다. 작중 인물과 자신이 어떻게 닮았는지, 그 부분에 왜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는지, 그 장면에서는 왜 눈시울이 붉어졌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글이 너무 짧은 걸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송 작가의 글을 매달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틈틈이 송 작가의 작품도 찾아 읽었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왔다. 딸애는 그 사이 입학을 했고, 분주한 학교생활 덕에 내가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자연히 줄어들었다. 나는 장당도서관 어린이 열람실 대신 학교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러면서 송 작가도 조금씩 잊혀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도서관 사서 선생님이 책 한 권을 권하셨는데, 그 책이 <<돌 씹어 먹는 아이>>였다. 다른 사람에게서 내 가장 친한 친구이야기를 듣기나 한 것처럼 반가웠다. 송 작가의 <<어떤 아이가>>, <<바느질 소녀>> 등은 읽어보았지만, 아직 <<돌 씹어 먹는 아이>>는 보지 못하고 있기도 했다.

<<돌 씹어 먹는 아이>>를 읽으면서 지난 해 매달 잡지를 펼쳐보던 설렘이 떠올랐다. 책에는 모두 일곱 편의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매일 한 편씩만 읽었다. 너무 빨리 읽어버리기가 아까워서도 그랬지만, 빨리 읽을 수도 없었다. 글은 짧았지만 행간은 길었다. 행간을 읽고 쓰이지 않은 이야기들을 상상하노라면 시간은 금방 흘렀다.

작가의 모든 이야기 속에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그 아이들은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다. 표제작 ‘돌 씹어 먹는 아이’에서 ‘연수’는 남다른 식성을 가지고 있다. 동네의 돌멩이를 모조리 먹어 치웠을 정도로 돌멩이를 먹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러나 가족들에게조차 사실을 털어놓을 수가 없다. ‘혀를 사왔지’에서의 ‘나’는, 엄마에게는 핀잔의 대상, 친구들에게는 조롱의 대상이지만 그들에게 반항은커녕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다. 심지어 ‘나’에게는 혀가 없다. ‘지구는 동그랗고’에서의 ‘영은’이에게는 집 나간 엄마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빠가 있고, 그 아빠는 무능력하기 짝이 없고 종일 공상에 빠져있다. ‘아빠 집으로’에서의 ‘영균’이는 불량배 조직과 고아원을 전전하다가 다행히 친부모를 만나지만 어쩐지 친부모가 편하지 않다. ‘종이 집에 종이엄마가’에서의 ‘미솔’이는 가수를 꿈꾸는 철없는 엄마 때문에 생면부지인 할머니 의 집 앞에 버려진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가장 후미지고, 험한 곳에서 세상을 그대로 직면하고 있다. 그들의 딱한 사정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나 그 딱한 사정들은 사실 내 사정, 우리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혀를 사왔지’의 ‘나’, 시원이에게는 혀가 없다. 혀가 없어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시원하게 말 한마디 못한다. 이야기를 읽고서 시원이가 안타까워 나는 혀를 찼다. ‘쯧쯧쯧’ 그러다가 문득 ‘시원이는 혀가 없는데, 내 혀는 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손끝을 입으로 가져가 혀에 대보았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축축하고 물컹한 이것이 혀인가? 정말 내 혀인가? 혀가 말을 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면, 어쩌면 손끝의 이것은 그냥 장식품일지 모른다.

나는 하고 싶은 말보다는 해야 할 말을 하고 산다. 직장 상사에게, 손님에게,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모에게,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은 꾹꾹 참아야 될 때가 많으며, 하고 싶지 않은 말을 마지못해 해야 할 때가 많다. 혀로 말은 하지만 그것은 말이되 말이 아니며, 역시 혀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이란 무엇일까? 혀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내 머리와 가슴을 가득 메운 이 말들, 혀 주위만 뱅뱅 맴도는 이 말들은 진정 나의 것일까? 물음이 늘어갈수록 말문은 막히고, 나는 혀만 차고 있다.

‘종이 집에 종이 엄마’의 ‘미솔이’, ‘아빠 집으로’의 ‘영균이’, ‘나를 데리러 온 고양이 부부’의 ‘지은이’ 이야기는 모두 거취의 문제에서 시작한다. 미솔이는 할머니 집 앞에 버려지고, 영균이는 기억에 없는 낯선 친부모네 집으로 왔으며, 지은이는 고양이 부부가 나타나 자신이 친부모라며 지은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한다.

미솔이는 참으로 기구한 신세다. 엄마가 친할머니집 앞에 버리고 갔고, 미솔이는 그 친할머니와 단둘이 살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죽었다고 생각하라던 엄마가 갑자기 다시 찾아와서 미솔이를 또 어떤 집 앞에 내려놓는다. 할머니는 몇 년 전 새 집으로 이사를 가서 지금 살고 있는 그 집은 할머니 집이 아니고, 같이 사는 할머니는 친할머니가 아니라고. 그러니 친할머니네 집 앞에서 친할머니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영균이는 늘 꿈을 꾸었다. 밝고 깨끗하고 친절한 부모님이 계신 집. 실제로 꿈이 현실이 되었는데, 부모님의 따뜻한 배려 속에서, 모든 것이 완벽한 그 집에서 영균이는 생각한다. ‘딱 하루, 오늘 하룻밤이라도 낡고 비좁은 그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

송 작가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아이들이다. 어린 아이! 그들은 사회적으로 아직 미성숙한 존재이다. 따라서 그들의 대리자인 부모나 보호자의 손에 거취가 정해지고,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도 드러나듯이 삶의 중요한 순간에서 대리자들은 항상 좋은 결정을 내리기보다 되돌리기 어려운 결정을 내리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아이보다 더 미성숙한 대리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이 우리 자신임을 미처 알지 못할 때가 많다.

일곱 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많이 안타깝고, 아프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절망할 필요만은 없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문제를 섣불리 대리자에게 위임하려 하지 않는다.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다. 온 몸으로 버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지만, 그 무게에 짓눌려 쓰러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 무게는 신의 버림을 받고 끊임없이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가 감내해야할, 고통스런 형벌의 무게와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들이 바로 나와 당신임을 안다면, 그래서 무게를 서로 나누어 질 수 있다면, 세상의 무게는 여전하겠지만, 우리가 견뎌내야 할 삶의 무게는 나누어 짊어진 만큼, 딱 그 만큼은 가벼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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