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경의 일상 속 평화이야기

임윤경

평택평화센터 사무국장

[평택시민신문] 가을 단풍이 절정을 치닫는 시절, 상강이에요. 길바닥에 울긋불긋 운치 있게 깔린 낙엽을 밟는 느낌이 참 좋아요. 그런 느낌을 온몸으로맞이하려 우리는 산에 오르죠. 오늘은 산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해요.

철학 용어에 ‘산 능선의 고비’ ‘7부 능선의 고비’라는 것이 있어요.
우리는 산을 오르죠. 저 산을 오르고 말겠다는 마음을 먹고 산을 올라요. 처음엔 옆에 꽃도 보고 경치도 즐기며 산을 오르죠. 그러다 점점 몸이 힘들고 쓸쓸해져요. 옆에는 아무도 없고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가 싶기도 하고. 그러다 산 능선에 올라요. 능선에서 보는, 산 정상은 바로 코앞이에요. ‘얼마 남지 않았어.’ 하고 힘내서 또 산을 올라요. 그런데 가도 가도 정상은 늘 그 자리인거예요. 능선에 앉아 이제 고민하기 시작해요. 내가 잘못 온건 아닐까? 저 정상이 혹시 헛개비 아닐까? 이렇게 힘들게 왔는데 뭔가 잘못된 길을 선택한 건 아닐까? 몸은 힘들고 마음은 지치고 극도의 고독감이 밀려와요.

그때 누군가 손을 내밀죠. ‘힘들었지? 너는 지금껏 잘 살아 온 거야. 너는 좋은 아빠(엄마)고 너는 할 만큼 한 거야. 이만큼이면 된 거야.’ 그 말에 우리는 그 사람의 손을 덥석 잡고 눈물을 쏟아요. 그래, 이만큼이면 된 거야... 그렇게 몸과 마음이 무장 해제되어 우리는 올라왔던 산을 내려가게 돼요.

우리는 때때로 어떤 일을 하다보면 내가 잘 가고 있나? 몸도 힘들고 마음은 지치고 혼자 이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고립감, 고독이 밀려오죠... 그럴 때 우리는 누군가가 손을 내밀고 누군가의 위로를 받게 되면 쉽게 무장 해제되어 여태 살아왔던 길을 바꾸거나 산을 내려오게 돼요. 이미 7부 능선까지 올라왔는데도 말이에요. 이것이 ‘산 능선의 고비’에요.

얼마 전, 백남기 어르신을 추모하는 촛불집회를 했어요. 그 집회에서 백남기 어르신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모두가 눈시울 붉히고 가슴 아파했어요. 그리고 부검을 반대하며 영정을 지키고 있죠. 백남기 어르신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고 아파하는 이유는 뭘까요? 바로 백남기 어르신의 죽음이 ‘너’의 죽음 ‘당신’의 죽음이기 때문이에요. ‘너’의 죽음, ‘당신’의 죽음은 3인칭의 죽음인 ‘그들’의 죽음이 아니에요. ‘너’라는 대상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신 거죠.

백남기 어르신의 죽음이 ‘너’의 죽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된 이유는 뭘까요? 바로 ‘산 능선의 고비’를 넘기셨기 때문이에요. 산 능선에서 되돌아가지 않고 꿋꿋하게 나가신 거죠. 백남기 어르신의 삶을 따라가 보면 한결같은 의지를 읽어낼 수 있어요. 아내와 함께 밀농사를 짓고 우리밀을 살리기 위한 활동들을 꾸준히 해오셨고, 된장 고추장을 담그며 평생을 땀 흘리며 농민으로 살아오셨어요. 경제발전만 우선시 하는 나라에서 농민으로 살아가기가 녹녹치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아마 고비고비 시련들을 자기 자신을 돌보고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좋은 이웃으로 살아오셨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백남기 어르신에게 ‘7부 능선의 고비’는 또 다른 어려움을 가진 이웃들과 함께 고독을 나누는 또 다른 시작이었다고 봐요.
그럼,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요? 나 또한 ‘7부 능선의 고비’를 넘기고 있진 않은 지 .... 그리고 산을 다시 내려가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보게 돼요. 혹시 우리 주위에 ‘7부 능선의 고비’를 맞고 있는 이가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이만큼이면 된 거야.’라는 얕은 위로보다는 그 사람에게 시간을 내주고, 그 사람의 짐을 나눠 들어주고, 그 사람이 힘들 때 옆에서 줄기차게 버터주면 될 것 같아요.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사랑이고 평화 같아요.

 

※이 기고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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