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옥

비전고등학교 학부모 독서모임

‘호시탐탐’ 회원

여름의 태양이 한풀 꺾이고 서늘한 아침 이슬이 더해지면 사람에게도 낙엽처럼 깊은 사색으로 물드는 때가 찾아온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기도 하지만 생각하기 좋은 시간이기도 한 이 가을에 후안무치의 세월을 버텨내는 방법으로 책만 한 선택이 없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을 통해 상념에 빠졌다. 이미 이 작가는 <자기 결정>이라는 강의를 엮은 책을 통해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스스로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능력, 즉 내적 독립성을 갖는다는 것은 외부 세계의 압제에 맞서 내 삶을 스스로 지휘한다는 것을 넘어서, 이제 그것과 완전히 별개의 의미로 내 삶의 작가, 내 인생의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격>을 덮고 ‘죽음의 격’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해봤다. 주변에서 부음을 전해 듣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은 이제 내 나이가 죽음을 통한 이별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난해 여름 폐암 수술 후에 가을 내내 항암치료로 병원을 오가다가 초겨울에 돌아가신 아버지……. 서른 번이 넘는 힘든 방사선 치료를 잘 받으시고 그 끝에 감기 증세로 입원하실 때까지만 해도 우린 전혀 상상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집으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되리라고는. 수술 후 수척해진 아버지와 바람 쐬러 나섰던 청풍호 산책을 마지막으로 더는 함께 따뜻한 가을 햇살 아래 걸을 수 없다. 휠체어에 앉아서도 나오길 잘했다고 하시며 옅은 미소를 머금은 아버지 얼굴이 눈앞에 선하다. 다시 돌이킬 수 있다면 그 짧은 가을에 우리는 병원을 오가는 대신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만 했다.

4기 자궁암 진단을 받은 90세 할머니가 병실에서 항암치료를 받는 대신 평생소원이던 미국 여행길에 나섰다가 1년 넘게 가족과 여행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얼마 전에야 길 위에서 행복하게 떠났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 소식은 페이스북 ‘드라이빙 미스 노마’를 통해 가족들에 의해 여정이 고스란히 기록되었다고 한다. 노마 할머니는 “지난 1년의 여행을 통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병실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는 대신 길로 나서길 잘했다고 생각한다면서 “내 여행이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까’라는 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맞는 죽음, 그 죽음에 격이 있다면 미스 노마의 모습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비단 여행이 아니더라도 어떤 방법이든 사는 동안에 자기 결정으로 행복하고 존엄할 수 있었다면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자신의 결정대로 마무리할 수 있는 권리야말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인생은 붙잡고 있기와 놓아주기 사이의 균형 잡기이다” -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루미의 시구를 떠올려 어느 순간 놓아야만 하는 때가 온다면 연명에 연연하기보다 잘 놓을 수 있도록 함께 준비하는 시간이 있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야 떠나는 사람도, 남은 사람도 잘 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나는 놓지 못하고 있다. 꿈에라도 좋으니 보고 싶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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