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희 수

시인

10월이 오면 가을 들판의 풍요를 즐기기 위해 팽성의 안성천 강변과 넓은 창내뜰을 걸으며 자연의 축제를 즐긴다. 하구의 강물은 깊은 강되어 더디 흐르고 여름을 견디고 키워온 벼들이 알알이 누런 겨자빛으로 논배미마다 가득하다.

이맘때쯤에는 들판의 논두렁길을 걷거나 조금 높은 도로가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드넓은 평야를 조망하는 것을 좋아 한다. 15년 전 이 낯선 도시(평택)에 이사를 와 마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향수에 젖을 땐 이곳을 찾아 마음을 달래곤 했다.

고향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혹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으로 굳이 사전적 의미를 찾지 않아도 그냥 고향으로 통한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본 사람은 누구나 그 단어만으로도 그리움이 절절하다. 그래서 고향은 모든 예술장르에 그 배경이요 원천으로 인간 본향의 사유의 터전이다.

시 문학에서 고향의 그리움은 이루 셀 수 없이 많지만 신라시대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 중에 쓴 <추야우중 秋夜雨中>시는 고향을 그리는 시의 전형이다.

“가을 바람에 홀로 시를 읊으니/ 세상에 내 마음 아는 이 없네/ 창밖에는 밤이 깊도록 비가 내리고/ 등 앞에 앉은 이내 마음은 만 리 고향으로 달리네.//” 타향에서 비가 올 때는 울적하고, 부모 생각이 간절하며, 몸이 아플 때는 슬프다. 이러한 경험은 바로 고향에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향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외에도 정지용의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잊을 수 없다고 마치 후렴구처럼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 김수영의 <고향>, 김규동의 <고향> 같은 시는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거나 시에서 저 멀리 있는 고향을 아련하게 읊었다

윤이상은 ‘우리민족은 내 음악의 탯줄이다.’라며 조국에 대한 향수를 그린 동서양을 가르는 작곡가였다.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등의 작품에서 죽을 때까지 조국과 통영을 그리워만하다 음악만 남기고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과 <첼로 협주곡>은 자신의 고향인 보헤미아의 자연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작곡가의 애틋한 시선과 고향 비소카의 자연환경이 그에게 무한한 창작 에너지를 제공하여 탄생한 명작이다.

그러하듯 필자도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시집에서 ‘내 놀던 고향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괴정리 사람들, 추석 즈음’은 고향을 떠나 평택에서 살면서 고향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들이다. 이런 낯선 이방인에게 향수를 달랠 수 있는 곳이 오성면 창내뜰이었다. 그 곳은 드넓은 벌판과 안성천의 물줄기 등 풍경이 내 고향 섬진강과 선두벌 들판을 닮아 있어서 어느새 제 2의 고향이 되었다

15년의 시간 속에서 수없이 찾았던 창내뜰, 특히 가을 벼논들의 누런 색채는 수채화를 압도하여 그림보다 아름답다. 들판사이 농로를 걸으면, 바둑판같은 논배미에 벼이삭들이 누렇게 익어갈수록 서로에게 기대며 껴안듯 포개져있는 모습에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인간들의 삶보다 더 정겹기 그지없다. 필자는 이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숭고함에서 겸손을 배운다. 살아 있는 동안에 더 섬기고 사랑하겠다고 말이다.

가을 들판에 한 번쯤 서보라! 그리고 하늘과 들판이 맞닿는 자연 앞에서 외쳐보라! 자연을 닮은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해 보라! 이 순수한 풍요 앞에 누구라도 시인이 되고, 누구라도 사색하는 철학자가 되어 이방인의 향수를 보듬어 줄 것이다

내일은 해질 무렵 황홀한 노을과 친구 되어 창내뜰를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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