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에세이 시와 함께 읽는 아버지 이야기 59

유 정 이

시인·문학박사

경희대 겸임교수

눈이 안 보여 신문을 볼 땐 안경을 쓰는
늙은 아버지가 이렇게 귀여울 수가.
박 씨보다 무섭고,
전 씨보다 지긋지긋하던 아버지가
저렇게 움트는 새싹처럼 보일 수가.

내 장단에 맞춰
아장아장 춤을 추는,
귀여운 아버지,

오, 가여운 내 자식.

- 최승자,「귀여운 아버지」

 

70년대 대표적인 여성시인인 최승자 선생의 이 한 편의 짧은 시 속에는 여러 개의 이야기가 중층적으로 그리고 심층적으로 겹쳐 있다.「귀여운 아버지」라니! 제목에서 당기는 역설과 반어의 묘미는 시의 첫 구절을 끌어다 읽게 만드는 묘미가 있다. 엄중한 권위 혹은 냉혹한 의 대명사였던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그런 아버지에 대한 수식어로서의 ‘귀여운’은 다른 의미를 내포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다음 행간(行間)으로 이동하면서 다시 읽을 때의 그 ‘귀여운 아버지’의 실체는 금세 드러나지 않는다.

단순히 “눈이 안 보여 신문을 볼 땐 안경을 쓰는/늙은 아버지”여서 귀엽다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신산한 세월을 몸으로 겪은 후, 나이 들어 신체기능이 떨어진 아버지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은 ‘안스럽다’거나 ‘안타깝다’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역시도 다음 시행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아버지’는 “박씨(분명 박정희)보다 무섭고/ 전씨(분명 전두환)보다 지긋지긋”하던 모습과 견주고 싶은 분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이력을 가졌다기보다는 그만큼의 체감을 느꼈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절대 권력자들에 맞먹는 ‘아버지’라는 존재. 기실 자식들에게는 멀리 있는 독재자보다는 가까이 있는 아버지의 엄중함이 더욱 절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월 앞에서는 그 서슬 퍼렇던 권위도 제 몫을 다하지는 못한다. ‘움트는 새싹처럼 보일 수’도 있을 만큼 쉽게 유약함의 모습을 보인다.

실제로 인간은 어느 기점을 중심으로 해서 한 쪽으로 이울어지는 순환의 삶을 사는 것만 같다. 심리적으로는 점점 아이처럼 단순해지고 신체적으로는 기력이 약해진다. 그러면서 세상을 호령할 것 같았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누그러지는 것, 그것을 우리는 종종 목격한다. 보살핌을 주던 주체에서 보살핌을 받는 대상으로 전회(轉回)하는, 길지 않는 삶의 주인공들이 바로 인간이 아닌가. 급기야는 극단적 무능 상태로 접어들어 ‘장단에 맞춰/아장아장 춤을 추’기도 하는 단계에 가기도 한다.

마지막 구절 ‘가여운 내 자식’은 아버지와 화자인 ‘나’의 짧고도 긴, 단순하지만은 않은 중층 서사를 ‘화룡점정’처럼 요약한 한 줄이 된다. ‘역설과 반어’ 그리고 중의의 기법까지 더해진 이 구절이 바로 이 시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는 부분이다. 부언하자면, 여기서의 ‘자식’은 직계자손이라는 의미의 ‘자식(子息)’이라는 의미도 되지만 그간의 ‘박씨’같고 ‘전씨’ 같았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담은 욕설(辱說)에 가까운 탄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연민에 가까운 ‘가여운’과 ‘자식’이라는 단어의 낯선 결합은 이 시를 보다 의미 있는 시로 깨어나게 한다.

진정한 화해는 단순한 이해로써 도달하지는 않는 것 같다. 도덕적 가르침, 독서를 통한 변화 등에는 한계가 있다. 저렇게 겪어보는 것,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절대 권력에 빗대어 퍼부어 보는 것, 그런 과정으로써만 진정한 이해, 완전한 화해에 도달할 수 있는 것, 아버지와 우리들의 관계에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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