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 연구수준을 전문화하고, 논의를 심화시킬 필요 있어

장순범 평택섶길추진위원장

1. 평택의 역사문화를 논의하면서 현 평택항 일대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중국 문물교류의 중심 역할을 수행해 왔다는 사실은 그 지리적 특성과 함께 평택의 문화정체성을 구성하는 주요 요인들 중 대표적인 상징성(돌출)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에 더하여 이와 연관된 경제 사회 문화적 요인 및 상호작용 등에 관한 전문분야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가 향후 우리 지역의 과제이다.

그런데 원효대사의 흔적이 있고 당진이라는 명칭에 의해 대중국 교역의 중심지였다고 생각하면서, 평택항 일대가 그 중심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지난 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어 본 연속 기고의 주제와는 약간 비껴갈 수 있지만 이와 관련된 두 가지에 대해 보충하며 논하고자 한다. 사실 고대시대에 크지 않은 배의 입출항은 바람, 날씨 등 여러 상황에 따라 예상치 않은 포구를 이용하게 되기도 하여 당진이니 평택이니 화성이니 하는 것이 쓸데없는 논란일 수도 있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삼국시대 이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각 나라간의 친소관계나 대외정책에 따라 이용되는 포구의 빈도나 위치가 계속 변동되어 왔다.

대진(大津)은 삼국시대에 백제가 혜군(槥郡: 현 당진 면천의 옛 이름)의 가리저(可里渚) 동쪽에 수군창을 두었다.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후, 관(館: 여행하는 자들이 머무는 숙소)을 설치하고 곡식을 쌓아두었으며 호를 수관(稤館)이라고 하였다. 당의 사개(使价: 사신)나 상고(商賈: 상인)들이 모두 그 관에서 묵었다. 조공하러 가는 신라 사람도 역시 이곳을 경유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대진이라고 하였다.

2.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해당시대의 원사료(原史料)를 통해 밝힐 수는 없지만 조선 후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水原府’ 하단의 기록을 역사학자에게 해석을 의뢰한 내용을 소개한다. (상단지도 참조)
김정호의 해설에는 대진에 백제가 군사용 창고를 두었고 신라가 점령한 이후에도 신라인들이 당나라와 많은 교역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에는 대진이 충청도 직산현에 속애 있으면서 아산만 건너편 포승에 위치하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조선후기에 직산현 외야곶면에 대진이 있었다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영토상으로는 수원부 지역(포승)에 위치하면서 행정적으로는 직산현에 속해 있었는데 이러한 것을 월경지(越境地)라고 한다.
월경지는 소속된 고을과 경계를 접하지 않고 다른 지역에 동떨어져 있지만 조세는 소속 고을에서 거두었다. 즉 내 영토의 일부가 남의 행정구역에 속한 것으로서 이는 과거 행정구역이었던 연고지에서 생선·소금과 같은 주요 물자의 조달, 조운(漕運)·조창(漕倉)의 필요성에 의해 형성된다.

직산현은 4곳의 월경지가 있었는데 고려 후기에 정해져서 조선 후기까지 존속했다. 그 4곳은 경양현(팽성 신대리, 본정리, 노양리 일대), 안중면(현덕면 황산리 일대), 언리면(오성면 대반리, 당거리 일대), 외야곶면(포승면 신영리 일대)이다. 직산현에 속해있던 현 평택시의 남서부 지역 대부분이 조선후기에도 수원부로 행정개편이 된 이후에도 직산현의 월경지로 남아있던 것이다. 월경지로 둘만큼 평택시 남서부지역은 대진을 포함하여 생산이나 교역의 다른 특수한 중추 역할을 수행하였던 땅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회경제적 배경, 즉 어떠한 역할의 구체적 필요성으로 월경지로 두었는지, 그리고 김정호는 어떤 근거와 자료를 바탕으로 대진이 삼국시대 이후 대중국 교류의 중심지였다고 말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연구가 향후 지역사 연구자들이 설명·논의해야할 과제일 것이다. 언제 어떻게 행정구역과 명칭이 개편되었다는 식의 단순히 2~3차 사료를 소개하는 수준으로 평택의 역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3. 다음은 역사학계의 일반론은 아니지만 참고할만하다고 판단되어, 위례백제에 대해 오랫동안 천안지역에서 향토사 연구를 해온 오죽심이라는 필명을 가진 분의 글 중에서 서론은 빼고 나머지를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여러 편의 대진(평택항)기행문 중 소근산성(현 화성시 양감면 신왕리 초록산)에 관한 글이다. 소근산성은 청동기시대부터 위례백제(BC18), 한성백제(475년경)에 이르는 테뫼식 토성으로 둘레가 639m라고 한다.
(출처  http://cafe.daum.net/ji888/7h5L/188)

《소근산성은 한남정맥 용인(龍仁) 부아산(負兒山)에서 발원한 진위천과 오산천, 광교산에서 발원한 황구지천, 3개 하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와 서해 남양만(南陽灣) 상류의 바다로 향하는 수구(水口)를 지키고 있는 지형으로 항곶(項串, 황구지천교 부근)은 충북 진천 도당산성, 대모산성(할미성)~안성 내혜홀 비봉산성~양성~평택 청북면, 화성 양감면으로 이어지는 삼국쟁패의 요충지 당항성로(黨項城路) 길목을 지키는 산성이다.

당항성(黨項城)을 화량진(花梁津) 인근에 있는 당성(唐城)으로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추정하는데 이는 합리적 논증이 못된다. 우선 주변의 지명을 살펴보면 항곶은 황구지천의 어원(語源)이며, 고잔(高棧)은 곶(串)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항곶~고잔, 항곶~청북면 삼계리 옹포(甕浦, 독개나루)는 지형상 남북으로 폭은 좁으면서 능선은 길게 이어지며 나지막한 구릉을 동서로 사이에 두고 아산만 진위천, 남양만이 나뉘는 천혜의 지형이다. 이런 지형을 닭의 목(달기목, 닭목, 당목=계항-鷄項)처럼 생겨서 붙여진 자연지명인 것이다. 예를들면 개목(구항-狗項), 노루목(장항-獐項), 쇠목(우항-牛項), 여우목, 새목 등이 있다. 닭목>당목의 우릿말 발음을 한자어로 바꾼 것이 바로 당항(黨項)이다.

닭머리는 물론 아산만방조제 입구에 있는 계두봉(鷄頭峯,鷄頭山)이며 예전 계두진(鷄頭津)이 있었다. 계두봉(鷄頭峯)은 현덕면 권관리 아산만 방조제 수문 입구에 있는 봉우리(현재 아산정)이며 자연지명으로는 닭머리봉이라 부른다. 계두진은 계두봉 아래에 있었던 나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에 ‘수원부 남쪽으로 80리인데 아산으로 통한다’고 기록하였다. 계두진은 안성천과 진위천 하류 끝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당진이나 아산으로 통하는 중요한 뱃길이었다. 임진왜란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전승지인 당항포(경남 고성군) 역시 지형이 닭의 목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인 이름이다. 진위(津威)란 지명도 원래는 진위(津上...나루의 윗쪽>진위-振威...뜻이 더 좋은 한자어)에서 교체되었으리라 추정된다.

화량진은 넓은 바닷물로 인해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수심이 깊지 않다. 그리고 태풍에 취약하여 대륙을 오가던 대중소형의 선박들이 피항하고 적군으로부터 배를 해안 깊숙히 감추기가 쉽지않다. 반면 남양만 옹포(청북 삼계리, 독개나루)와 고잔 등의 항포구는 수심이 깊어 큰 배의 운항이 비교적 자유롭다. 그리고 강력한 태풍과 적군의 눈을 피해 선박을 깊히 감추고 공격과 수비가 훨씬 수월한 지리적 이점을 지닌 항포구인 것이다. 한반도의 계절적 특징인 여름철 동남풍과 겨울철 북서풍 그리고 해류(海流)의 흐름을 타고 순풍(順風)에 돛 달고 대양(大洋)을 항해(航海)하는데 최적지 또한 이곳이다. 현대의 초대형 선박들도 입출항이 자유로운 지금 평택항(平澤港)은 예나 이제나 대진(大津, 한진나루)으로서의 기능을 충족시키는 천혜의 항구인 것이다. 화성시 소근산성에서 평택시 자미산성(용성)까지의 당항성(黨項城)은 백제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로 삼국쟁패의 각축장인 동시에 대중국 교역로이며 당나라 사신들과 장사꾼 유학생 고승(高僧)들이 오가던 국제무역항이며 전세계로 향하는 해양 코리아실크로드(Korea Silkroad)이었다.

4. 위의 천안지역 향토사가의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대진(평택항)에 관한 역사적 사실과 그 역할에 대해 애향적인 차원에서의 강변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진에 특별한 연고가 없는 분이 대진의 과거역사와 향후 대진이 나가야 될 방향까지도 이미 제시하고 있다는 것에 지역민으로서 부끄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당항성이 특히 삼국통일 전후 시기에 대중국교역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역사학계에서 일반론이지만 현재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앞의 위례백제 향토사가의 글에 부언하면 화량진(현 대부도와 화성 송산면 사이)은 수심이 얕고 좁아 뱃길로 이용하기에 위험하다는 여러 기록이 있다. 그리고 경기만 일대에서는 아산만이 그중 수심이 깊어 통일신라 이후 선박의 규모가 커지면서 대진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었다. 이는 청일전쟁 당시 곤지진(팽성 대추리)을 통해 청군이 입항하거나 현대에 들어 화성이 아니고 이곳 대진에 평택항을 건설한 것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원효대사가 도를 깨우쳤다는 곳이 당진이나 당성(화성 서신면 상안리)이라고 확정하는 역사학자는 우리나라에서 아무도 없다. 당진 쪽에 원효의 흔적을 얘기하기도 하는데 원효가 거쳐 가거나 세운 사찰은 전국에 수없이 산재한다. 또한 화성시가 의뢰한 10여년 전의 당성 발굴조사에서도 그와 연관된 유물이나 유적을 발견하지 못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원효가 득도하였다는 수도사의 위치는 현재의 수도사가 아니고 수도사 입구 우측의 석유공사 부지였던 것으로 고대 교통로에 관해 가장 권위있는 단국대 조사단이 밝히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2016년 진행되고 있는 박물관과 지역향토사 논의에 관해 논하기로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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