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역사는 지금 우리 현실 삶속에서 진행형으로 움직인다

 

 “박물관의 핵심주제가 되는 평택지역의 역사문화를

단순하게 나열하고만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한계점이며

그로부터 많은 문제를 파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장순범 평택섶길추진위원장

1. 지난 글과의 시차가 길어져 지난 글을 요약하면, 우선 평택시립박물관 건립 타당성조사 중간보고서의 문제점으로, 박물관 건립배경, 근거, 방향, 기본개념이 평택시의 박물관이 아닌 전국 어떤 기초자치단체의 이름으로 바꾸어 사용해도 무방할 정도로 평택 역사문화의 특성이 없으며, 이러한 수준의 내용이라면 시립박물관이 아닌 평택서부, 남부 등 소권역 향토사료관으로 대치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둘째로 시립박물관의 접근성에 중심을 둔 입지에 관한 논쟁이 일고 있는 것은 시립박물관의 주제가 되는 지역문화정체성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며, 시립박물관 건립을 논하기 전에 평택지역의 문화정체성에 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첨언하자면 사실 어디에 입지하든 차량을 이용하지 않고 박물관에 접근할 수 있는 시민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평택시 교통여건을 감안하면 시립박물관 건립에서 평택시민들의 접근성이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없다고 판단된다. 시립박물관의 주제가 무엇인지에 따라 그 의미나 상징성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입지를 우선 논의하고 난 후에 부차적으로 접근성에 관한 논의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무의미한 논쟁은 평택시립박물관이 평택시를 대표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매력적인 박물관이 되어 이웃지역에서나 전국에서 관람하러 올 수 있는 박물관이 되어야 한다는 고민도 없이 그저 어디에나 비슷하게 있는 동네 향토사료관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한계를 또다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셋 째 평택문화정체성의 논의가 먼저 필요하며 역사문화는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리고 문화는 경제와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으며 소권역 향토사료관이 아닌 평택시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라면 문화적, 교육적인 역할과 함께 지역경제 활성화 소임도 수행할 수 있는 박물관이 되어야 한다.

 

2. 중복되지만 지역의 정체성에 관한 의미를 강조하기위해 공주대 이해준 교수의 글을 인용해 본다.

“우리가 지역의 전승문화를 계발시킨다는 것은 지역문화의 특수한 <가치관>과 <생명력>을 현재(미래)에 재 투영 또는 재활용할 수 있도록 발견하여 지역민들이 지역민으로서 느끼는 동질성(지역성)과 공감대의 기반, 곧 “지역적 정체성”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는 구조적․종합적 모습으로 파악되어야 생명력이 있다. 지역사는 모든 자료의 나열보다는 ‘돌출’된 해당지역의 문화를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여기에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이나 갈등․타협의 양상이 연속되면서, 복잡한 자체 변용 과정이 반영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다. 따라서 이를 단순하게 나열하고 만다면, 이는 자칫 지역사의 실제 모습과 의미를 축소하고, 연구 수준을 낮게 평가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와 연관되어 보고서 이야기로 돌아가면, 박물관 용역기관이 전문성이 없다고 지역신문이 평가절하하고 있는데 그러한 평가에 대한 여러 논거보다도 박물관의 핵심주제가 되는 평택지역의 역사문화를 단순하게 나열하고만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한계점이며 그로부터 많은 문제를 파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용역기관은 어떤 자료와 근거로 전시 시나리오의 기본 방향과 개념(평택의 역사 문화)을 설정하였는지를 밝혀야 한다.

이러한 양상은 향토사 관계자 등이 모여 만들었다는 ‘평택박물관연구소’의 평택박물관 설립 연구 내용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다음번 글에서 지역 내에서의 박물관관련 논의와 지역 향토사 연구 현황에 대해 논할 예정)

즉 이해준교수의 표현을 빌어 쓴다면 평택의 역사와 문화를 구조적, 종합적 모습으로 파악하지 못하며, “돌출”된 역사(문화)를 주목하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현상인 것이다.

 

3. 이제 평택의 문화정체성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간략히 살펴보면, 문화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 요인이 되는 평택의 자연지리적 환경은 너무도 단순 명료함에도, 보고서에서는 정체성이라 하여 어떤 도시, 어떤 지역에서 사용해도 무방한 ‘풍요, 들판, 배려, 길, 안녕’ 등의 추상적 단어들을 상호연관성 없이 나열하고 있다.

한 마디로 평택의 자연지리적 조건은 한반도 중앙에 위치하여 중국과 가장 인접한 황해연안지역, 해양도시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연안지역 해양도시 중에서도 바닷물길이 내륙 경계 끝까지 이어져 해운이 가능하였던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다. 중부지방에서는 해안가에서부터 내륙 깊숙이까지 가장 많은 크고 작은 포구가 있었던 지역이다. 물길로 둘러싸여 물로 평택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문화정체성의 또 다른 구성요인인 역사적 경험, 전통과 문화적 접변에 관해 상징적으로 대표(돌출)되는 과거와 현재의 두 가지 사건을 살펴보면 의미 있는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지리적 위치로 중국의 선진문물을 직접 접촉할 수 없던 이유로, 삼국 중 문명발달이 늦었던 고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기 전인 6세기 중국과의 직접 통로를 확보하기위한 치열한 전쟁을 치른다. 당시 평택항(大津)을 차지하기 위해 삼국의 치열한 전쟁 속에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다가 결국 신라가 차지하면서 564년 처음으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 교류를 하게 된다.
이후  대진(平澤港)은 조공무역, 사신왕래, 불교유학생 등 대당나라와 교역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로써 선진문물 교류와 나당연합군의 결성 등으로 삼국통일의 주도권을 갖게 된다.

원효와 의상대사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위해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서 고구려 군사에게 잡혀 첩자(세작)로 몰려 한 달여간 갇혀 있다가 경주로 되돌아간다. 10년 후 신라가 평택항 일대를 장악하자 두 사람은 다시 당나라로 가기위해 육로가 아닌 해로를 이용하기 위해 평택항(포승 원정리 수도사)까지 와서 원효는 해골의 물을 마시고 득도하여 되돌아가고 의상만 뱃길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약 70여 년 후 한국 최초의 세계인으로서 실크로드의 개척자인 혜초가 등장한다.
150년도 아니고 거의 정확하게 1,500년 후인 2015년, 지금의 시대로 돌아와서 살펴 볼 사건이 있다. 작년 2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우리지역 출신 여당 두 국회의원이 주도하여 국회의원회관에서 ‘황해-실크로드 익스프레스 대토론회’를 개최하였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기간 추진되었던 남북한 철도를 이어 중국의 대륙횡단철도를 연결하여 유라시아를 잇는 신실크로드를 만들려는 시도는 이명박, 박근혜정권이 들어서고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대륙횡단철도 실크로드 추진이 중단되었다.

이제 북한(고구려 땅)과 적대적 관계로 교류가 막히자 다시 해로를 이용하여 평택항에서부터 열차 페리로 한국과 중국을 직접 연결하는 실크로드 익스프레스라는 차선책을 찾자는 제안을 하게 된 것이다.(바다물길을 통한 열차 페리의 경제적 실효성과 남북교류 협력에의 우선성 등의 가치 판단은 별도의 논의 필요성)

 

4. 너무도 똑같은 역사경험의 재현이다. ‘실제로는 세계화와 같은 국제사회의 변동에 적응하려고 우리 민족이 고민하고 노력한 것은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다. 세계화의 성격과 이념에 대한 인식은 이미 삼한통일 이후 시대의 우리 역사에서부터 존재했다.’(인용)

현재의 자리에 위치한 평택항은 그 경제, 문화, 군사적 역할을 이미 고대 국가가 형성되는 삼국시대 이후 현재까지 거의 완벽하게 똑같이 수행하여 왔던 것이다. 과거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각기 구분되고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우리 현실의 삶속에 진행형인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자연스럽게 그냥 보여주고 있다.(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현재와 미래에 평택항이 평택지역 전반에 미치는 경제, 사회, 군사, 문화적 역할과 기능은 다른 차원에서 참조 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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