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에세이 시와 함께 읽는 아버지 이야기 51

끝까지, 한 줄로 읽고 싶은 내 인생의 원적지

유정이

시인·문학박사

경희대 겸임교수

이교상,「東海」

 

 꽃은 피는데 몸은 아프고 원고는 밀렸다. “꽃망울 속에서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파동”(조지훈)으로 봄이 몸살을 앓는다면 나는 무엇으로, 무엇을 위하여 아픈가? 감히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전조로서의 몸살이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기운이 쇠하고 의식이 또렷하지 못하며 모든 의욕이 저조의 바닥을 향해간다.
 보통은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나거나 화들짝 놀라는 일을 당할 때 “엄마!” “엄마야!”하는 발화가 상례이다. ‘엄마’는 학습한 언어가 아니고 그런 식의 본능어이다. 그런데 몇 지인 가운데 같은 경우를 당했을 때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매우 인상적인 느낌으로 다시 돌아보곤 하였다.
 몸이 바닥으로 가 누울 만큼 아프니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명심보감)이라는 글귀를 신뢰하고 있었나보다. 나를 낳으신, 그러니까 내게 몸을 준 그 분을 생각한다니 말이다. 그 분이 내게 준 신체를 따져보면 내가 그 분의 소속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여 여자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예쁘다’는 말보다 ‘잘생겼다’라는 말을 들어왔을 터이다. 외형뿐 아니다. 나는 골수까지 남자여서 장남의식으로 무장하고 살고 있기도 하다.
 제언하고, 글빚을 지고 보니 아버지 생각이 더 나기도 한다. 언젠가 나는 ‘아버지만큼 아련한 밥은 없다 어두운 가계(家系)에 도달해야 비로소 슬픔이 제대로 도굴된다(경비원 아버지)’를 말한 적이 있다. ‘아버지에 도달해야 슬픔이 제대로 도굴된다’는 말은 그 지점에서 시의 언어가 건져진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교상 시인의 위의 짧은 시 ‘끝까지, 한 줄로 읽고 싶은 내 인생의 원적지’는 위 시의 화자(시인)가 얼마나 감격스럽게 동해를 만나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맑고 푸른 물이 일렁거리는 바다, 서해에서 만나는 느낌과는 격이 다른 크고 원대한 기상이 그대로 느껴지는 곳, 전경에는 속 깊이 그 바람과 파도가 가슴을 시원하게 해갈하는 먼 지점으로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한 줄 수평선이 보기 좋게 그어져 있다. 시의 화자(시인)는 그리하여 동해가 주는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격을 ‘한 줄로’ 그리고 ‘끝까지’ 읽고 싶은 ‘인생의 원적지’라고 매우 단정적으로 선언하였을 것이다. 시인으로서 시의 원적지를 말하고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동해’의 속성에 밑줄을 그으면서 시와 삶의 가치가 그로써 출발하고 또한 그것으로 귀환할 수 있음을 이처럼 간명하게, 강렬하게 선언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내 생물학적 생의 원적지는 ‘아버지’이고 문학의 원적지 역시 그러하다고 나는 말한다. 아버지를 다 읽지 못했으므로 나는 아직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한 자일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풍경을 다 만나고 비로소 마지막으로 만난 ‘동해’에서 깨닫는 원적지의 체험처럼 나는 다만 세상의 모든 텍스트를 다 읽고 난 후에도 내 생애 최고의, 유일한 텍스트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내 생물학적 생의 원적지는 ‘아버지’이고 문학의 원적지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아픈 몸을 일으켜 아버지라는 밥을 먹는다. 밥을 먹고 책상에 앉아 밀린 글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다. 아버지는 새 시의 원적지이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