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에세이 시와 함께 읽는 아버지 이야기 50

유정이

시인·문학박사

경희대 겸임교수

진주에 가면
그 여인을 꼭 만나야지
남강에서 만날까
촉석루에서 만날까
지하철 앞자리
젊은 여인의 가녀린 목에
진주목걸이가 빛난다
진주에 가면
그 여인을 꼭 만나야지
생각만 하다가 끝내 못가고
은하수처럼 출렁이는
섬진강 다리도 건너지 못하고
진주목걸이의 여인이 하늘하늘
샛강 역에서 내린다
  (중략)
진주에 가면
그 여인을 꼭 만나야지
물로 만나
한 오백 년 흘러볼까
불로 만나
천 년 만 년
저녁놀로 타올라볼까
-허형만,「진주에 가면」

이 시의 화자는 지금 지하철 의자에 앉아 있다. ‘샛강역’이 언급되는 것을 보니 9호선인가 보다. 뜬금없이 ‘진주’에 가고 싶다며 ‘남강’이나 ‘촉석루’를 떠올리는 이유를 살펴보니 ‘앞자리’에 앉은 여인 때문이다. ‘지하철 앞자리/젊은 여인의 가녀린 목에/진주목걸이가 빛’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화자는 그 ‘젊은 여인의 가녀린 목’을 정직하게(?) 넘겨다보지는 못하고 그곳에 걸린 ‘진주(珍珠) 목걸이’를 흘끗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는 시침을 떼듯이 재빨리 그녀의 범주로부터 벗어나 같은 음상을 가진 단어 ‘진주(晉州)로 그 마음의 풍경을 따돌리고 있다. 시인과 시의 화자는 분명 같지 않으나 이 시를 읽으면서 평소 가까이 존경해왔던, 시단 최고의 신사(紳士)이신 허형만 선생님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빙긋이 웃음이 지어졌다.
다시 살펴보면서 ‘지하철 9호선’ ‘젊은 여인의 앞자리’에 앉아 있는 그 분을 나의 ‘아버지’의 모습으로 겹쳐 읽게 되었다. 현실에서 이루고 있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에서나마 일으켜 세워보는 감정,  ‘물로 만나/한 오백 년 흘러볼까/불로 만나/천 년 만 년/저녁놀로 타올라볼까’ 라고 ‘딴생각 혹은 딴세상’을 상상해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불현 듯 떠올랐던 것이다.
보통 우리들의 무의식에는 부모나 조부모가 태생부터 그런 존재였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자식에게 ‘아버지’는 처음부터 ‘아버지’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믿는다는 말이다. 그런 ‘아버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욕망을 허여 받지 못한 사람으로 재탄생된다.
우리 아버지들의 ‘딴생각’은 언제까지 이어졌을까? 혹시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십 중반을 넘은 나도 더러 ‘딴생각’을 하면서 그 분이 나의 ‘아버지’로 만난 이후 그러니까 스물 대여섯 이후의 아버지가 단 한 번도 ‘딴생각’을 한 적이 없는 사람, 혹은 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이 새로울 따름이다.
‘딴생각’은 습관화한 일상에 환기 혹은 활기를 주기도 한다. 지금의 내 아버지가 위 시의 화자처럼 ‘딴생각’을 하고 있다면 나는 박수를 쳐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생각을 넘어 ‘샛강역’ 근처 ‘진주목걸이의 젊은 여자’를 따라 내린다 해도 마찬가지다. 물론 아직도 옆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엄마에게는 일급비밀이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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