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에세이 시와 함께 읽는 아버지 이야기 47

유정이

시인·문학박사

경희대 겸임교수

시간을 돌아서 가보면
폐사지처럼 버려진 아버지
방 아랫목 길게 누워 있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꿈결에 다녀갔는지
훠이- 손을 내저으며 바람을 내보냈다
가늘고 긴 손이었다
전생에 뱀이었을까

똬리 틀고 동면에 들어가신 아버지
숨 끊어질듯 토해내던
천식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종일 카세트에서 아버지가 듣던
김영임의 회심곡이 흘러나오고
아버지의 방은 근원을 모르는 냄새가 퀴퀴하다

봄볕이 문지방을 넘어 아랫목까지 들어왔지만
아버지는 깨어나지 않았다

오래고 깊은 잠
머리맡에 물 한 대접 놓였다

아버지 소풍간다-
잘 다녀오시라고 손을 흔들었다
멀리 소풍을 간

가끔 동면에 들어간 아버지를 생각한다

-이가을, 「아버지의 소풍」

 

이 시에 보이는 그림은 간결하다. 화자는 지병으로 오래 ‘천식’을 앓던,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가버린 아버지에 대한 간헐적 기억을 담아낸다. 오랜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처럼  ‘폐사지처럼 버려’진 존재였던 그(그녀)의 아버지는 ‘종일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회심곡’을 들으며 언제나 ‘방 아랫목 길게 누워 있’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는 ‘똬리 틀고 동면에 들어가’고 ‘숨 끊어질듯 토해내던/천식소리’도 함께 깊은 잠에 들었다. ‘봄볕이 문지방을 넘어 아랫목까지 들어’오는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날이건만 ‘아버지는 깨어나지 않았’다. 저 세상으로 가신 것이다. 그(그녀)는 그렇게 ‘동면에 들어간 아버지를’ ‘가끔’ ‘생각한다’고 고백한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소풍’으로 비유하여 시화(詩化)한 사람은 천상병 시인이다. 그는 인간의 한 생을 그저 잘 놀다 가는 ‘소풍’으로 규정하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천상병,「귀천」부분)’겠다고 했다. 이는 태어나 자라고 지각을 갖고 인생을 살았던 짧거나 혹은 긴 생을 ‘소풍’이라는 하나의 이벤트, 미시사건으로 간단히 규정함으로써 생사에 대한 가벼운 초월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로 유명하다. ‘소풍’지는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이 모든 생의 서사들 또한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범위를 넓게 보면 천상병 시의 인식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창세기 3장 19절)’가는 일이고, 근원으로 가는 것이 곧 죽음이라는 것에 도달한다.
그러나 위의 인용 시에 보이는 화자의 아버지는 처한 상황이 조금 다르다. 그는 ‘소풍’을 온 것이 아니라 ‘소풍’을 떠난 아버지를 회억하고 있다. 그(그녀)의 아버지가 영위한 삶은 ‘소풍’이라 가벼이 여길 수 없는 험지, 병회색의 암울한 수용소였을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속담이 무색할 만큼 화자의 아버지는 이승이 수형지만 같지 않았을까? 하여 ‘아버지 소풍간다-’라고 떠나는 아버지에게 그(그녀)는 ‘잘 다녀오시라고 손을 흔들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에 보이는 그림일 뿐, 깊은 이면에 웅크렸을 아버지에 대한 연민 그리고 그리움은 자주 그(그녀)의 ‘오래고 깊은 잠’을 깨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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