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우여곡절 끝 김정호 대동여지도 부분도 통해 확인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14

김해규(한광여고 교사)

망해산의 위치에 대한 생각들


평택에서 포승면 원정리 괴태곶이 봉수 외에 망해산 봉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신증 동국여지승람에서였다. 그 뒤 세종실록지리지와 대동지지 그리고 팽성지 등 읍지(邑誌)에서도 확인하였는데, 그곳에는 하나같이 "옛 경향현 지역인 직산 경계에 있다"고 기록되었다. 경양현은 조선 초 계양지역을 말한다. 그래서 내심 이 곳에 봉수대가 있었으면 주변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에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평택시청 문화관광과와 팽성읍 면사무소에 전화로 위치를 물었지만 모두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한 1 : 25000 지도와 1 : 5000 지도를 검토했지만 이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직산 경계라고 했으므로 아산경계(영인현)인 계양보다는 성환면 경계인 노와리나 추팔리 쯤에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수소문을 해봤지만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 것은 경기도 박물관에서 발간한 "평택의 역사와 문화유적(1999)"이었다. 이 책은 망해산 봉수의 위치가 평택시 용봉산(신한고교 뒷산)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의 근거는 아마도 일제가 실시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기록된 "丙南面 碑前里 私有 庸峰山 烽燧"(병남면 비전리 사유 용봉산 봉수)를 근거로 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경기도 박물관의 판단은 큰 착오였다. 용봉산에 봉수대가 설치되려면 평택주변의 봉수로와 관련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범위를 확대하여 부산 동래의 다대포진에서 시작하는 제2봉의 내륙경로를 추적해 봐도, 충주, 음성을 거쳐 죽산 건지산과 용인 석성산, 광주 천림산을 지나게 되어있어 이 곳과는 관련이 없었다.

망해산 봉수의 위치를 새롭게 깨달은 것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부분도를 통해서였다. 그것은 아주 우연한 발견이었는데, 옛 평택현 지역이었던 팽성읍을 보고 있다가 망해산 봉수를 발견한 것이다. 대동여지도에 그려진 망해산 봉수의 위치는 평택의 용봉산도, 노와리 부근도 아닌 팽성읍 신대리였다. 그 때서야 나는 무릎을 쳤다. 그동안 신증 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지지, 팽성지를 보면서도 옛 경양현이 1895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 만해도 직산현 소속이었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작은 기록이라도 세심하고 꼼꼼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소홀히 한 탓이었다.

봉수제도란 무엇인가?

그러면 여기서 잠시 봉수제도에 대하여 알아보고 가기로 하자. 봉수(烽燧)란 말은 횃불을 의미하는 봉(烽)과 연기를 의미하는 수(燧)의 합성어로, 전기나 무선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古代)이후 근대(近代)까지의 통신제도이다. 이 제도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지역에서 사용되던 통신제도였다. 중국에서는 주(周)나라 유왕이 포사라는 총애하던 후궁을 웃게 만들려고 거짓으로 봉화를 올리고 북을 크게 울리게 하여 제후들을 달려오게 하였다는 고사(古事)가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고대의 모든 국가에 봉수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있어 일찍부터 봉수제도가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봉수제도는 송나라 사신이었던 서긍의 고려도경에도 나오며, 조선 세종 때에는 고려의 봉수제도를 근간으로 당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제도가 새롭게 정비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봉수(烽燧)는 위치나 임무에 따라 경(京)봉수, 연변(沿邊)봉수, 내지(內地)봉수 등 3종류가 있었다. 경(京)봉수는 한양의 목멱산(남산) 봉수를 말하며, 연변(沿邊)봉수는 국경이나 해륙 연변의 제 1선에 설치된 봉수를 말하고, 내지(內地)봉수는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봉수로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이 있었다. 전국에는 약 623개소의 봉수대가 설치되었고, 모든 봉수는 한양 목멱산 봉수와 연결되었다. 그 중에서 망해산 봉수는 전남 여수 앞 바다의 돌산도 방답진에서 출발하여 목멱산 봉수로 연결되던 제5로(路)였다. 이 봉수로는 전남의 해남, 나주, 목포, 부안, 등 해안을 따라 올라오다가 전북 옥구에서 조창(租倉)이 있던 함열과 금강의 중요한 내륙 항구였던 은진(강경)을 거쳐, 공주, 천안을 지난 다음 아산의 연암산 봉수를 거쳐 망해산 봉수에 이르는 직봉(直烽)이었다. 또 망해산을 지난 봉수는 포승면 원정리의 괴태곶이 봉수에서 당진을 거쳐 올라온 간봉과 합쳐진 뒤 화성 흥천산 봉수로 연결되었다.
봉수대에는 오장(伍長)이라는 하급장교와 봉졸(烽卒-봉수군)이 배치되었으며, 잘못된 방화로 횃불이나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봉수대 근처에서는 무당에 의한 굿이나 제사를 금하였다. 봉수대에서 사용하는 땔감은 불에 잘 타는 싸리나무 등이 사용되었다. 불을 피울 때는 연기가 곧게 높이 올라가도록 땔감이나 섶 위에 이리 똥을 섞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리 똥을 구하기가 어려워 쇠똥이나 말똥을 사용하였다. 연변봉수에서 출발한 봉수가 목멱산 봉수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약 한 나절이 걸렸다. 이것은 상당히 빠른 것으로 평균으로 한 시간에 약 110km식 전달된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봉수(烽燧)가 항상 제 기능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봉수제도 무용론과 폐지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봉수제(烽燧制)는 조선 말까지 역원제(驛院制)와 함께 정치, 군사목적의 중요한 교통, 통신제도로서 기능을 담당하다가, 개항 이후 전신, 전화가 발달하면서 1894년 갑오개혁 때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다.

망해산 봉수를 찾아서

지난 2월 말 송탄에 있는 효명종고의 장연환 선생과 답사에 나섰다. 겨울 끝자락이어서 날씨는 제법 쌀쌀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팽성읍 객사리를 지나 둔포방면으로 달리다가 계양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하였다. 신대리는 신대1리(새터), 신대2리(장단), 신대3리(영창)으로 구성되었다. 신대(新垈)라는 지명은 우리말로 새터이다. 새터라는 지명은 풀이할 것도 없이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신대리의 모든 마을이 최근에 형성된 것은 아니다. 신대리 중에서도 신대1리(새터) 마을은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도 있었고, 1914년 일제가 제작한 지도에도 나와있는 것으로 봐서 형성시기가 조선 후기 이상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장단마을과 영창마을은 해방 후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특히 장단마을은 6.25사변 때 황해도 장단 땅에서 월남한 피난민들이 집단 수용되었던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생계가 막막했던 이들은 당시만 해도 갯벌이 대부분이었던 도두리 벌 한쪽을 간척하여 농토를 만들었는데, 소유권조차 주장할 수 없었던 이 땅이 어찌 어찌해서 세종대학교 재단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최근 몇 년 동안 큰 곤욕을 치뤘다.

나는 망해산이 대동여지도의 위치로 볼 때 신대리 영창마을 서쪽에 있는 봉우리라고 짐작하였다. 봉수대는 주변이 잘 조망되는 산봉우리에 있는 점이 특징인데, 신대리에서 가장 좋은 위치는 영창마을 서쪽 두 개의 봉우리였기 대문이다. 특히 이들 봉우리는 지형적 위치 대문에 최근에는 군부대의 레이더기지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 사실은 송탄고등학교의 정기천 선생이 일깨워줬는데, 영창마을 뒷산에도 레이더기지가 있어 나의 심증을 굳혀주었다.
신대리에서 우리는 영창마을 노인정을 방문했다. 노인정에는 할아버지 6, 7분이 계셨는데, 이 마을 뒷산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산을 가리키며 레이더가 있는 봉우리를 뭐라고 부르냐고 물었더니, 50년대 경상도에서 이주했다는 할아버지 한 분이 "뒷산이라고 하지"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혹시 봉우재라고 부르지 않아요"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더니, 그제서야 옛날부터 살았던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분명해진다. 계양 땅이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직산 땅 경양면이었고, 그 이전에는 경양현이었으며, 이 산의 명칭이 "봉우재"라면 망해산 봉수가 이 곳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답사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은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을 때이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추스리고 도두리 출신의 민족가수 정태춘이 부른 "에고 도솔천아"를 흥얼거리며 노랫말에 나오는 함정리 아리랑고개를 너머 선말 고개를 지났다. 서원말(선말) 입구에는 전설이 가득한 도두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위에는 도두정이라는 정자(亭子)가 있어서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쉬어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은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도두암 바위를 답사하고, 도두리벌을 가로질러 대추리로 건너오면서도 들뜬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답사는 이 맛에 하는 것이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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