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성읍 함정리 출신·병자호란 척화파 삼학사로 후세 이름떨쳐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9

김해규<한광여고 교사>

사당터 미군시설 수용되고 본정리 꽃산에 초라한 묘역만 남아


1.계양지역의 역사와 삶

평택시 팽성읍에 속한 계양은 팽성읍과는 역사와 문화가 다른 지역이다. 이 지역은 지난 100년 동안의 간척사업이 있기 전만 해도 넓다란 개펄과 바다가 인접한 전형적인 반농반어(半農半漁)의 고장이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전국 10대 조창(租倉)의 하나였던 하양창(河陽倉)이 노양리(계양)에 있었다. 더구나 현덕면 권관리에서 계양지역까지 이 일대에는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이 많았다. 이와 같은 중요성 때문에 고려는 지명(地名)을 경양현(慶陽縣)으로 고친 뒤 현령(縣令)을 두었다. 그래서 경양현의 현령은 조창을 관장하는 일 외에도 소금의 생산과 관리를 관장하는 염장관(鹽場官)을 겸했다. 이와 같은 조건 때문에 고려시대 계양지역은 조창과 소금생산을 중심으로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
조선 초 태종 5년에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국적인 행정구역의 통폐합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경양현은 직산현에 편입되고, 하양창은 아산현의 공세리로 옮겨가서 공진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행정구역이 강등되고 조창이 폐지되면서 계양의 번영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조창을 중심으로 발달한 상업과 함께 생산활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소금의 생산도 조선시대에는 쇠퇴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업경제의 쇠퇴로 계양지역은 열악한 농업환경과 아산만의 어업으로 생계를 잇는 가난한 마을이 되었다. 농업과 어업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던 계양지역은, 갑오개혁(1895) 때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평택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2.홍익한과 병자호란

충정공(忠正公) 홍익한(1586-1637)은 본관이 남양(南陽)이고 호는 화포(花浦)이며 평택시 팽성읍 함정리 출신이다. 역사에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굳은 지조와 절개를 지켰던 삼학사(三學士)의 한사람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홍익한은 중종 때의 정난공신으로 종1품 찬성(贊成)을 지냈던 당원군 홍숙의 현손이다. 그러나 그의 대(代)에 와서는 부친은 진사시에 등과(登科)하고, 백부는 교위(校尉)벼슬을 할 정도의 비교적 한미한 집안이 되였다.
홍익한은 이정구(李廷龜)의 문인(門人)으로 알려져 있다. 이정구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명필로 윤근수의 문인이었으며, 인조 때 척화파의 대표적 인물인 김상헌, 조익 등과 동문(同門)이다. 학문적으로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하였던 이정구는 정치적으로 서인(西人) 강경파의 한사람이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적극 참여하여 정승(政丞)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명(明), 청(淸) 교체기에 성리학적 명분론에 충실한 척화파(斥和派)로서 반청(反淸)여론을 이끌었다. 학파(學派)와 붕당(朋黨) 그리고 지역(地域)이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가졌던 조선 중기에, 홍익한의 사상적 특징과 정치적 관계는 스승 이정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병자호란 때 그가 주장했던 척화론과 같은 배청(背淸)적 입장도 이정구나 같은 학파의 김상헌, 조익 등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홍익한이 대과(大科)에 급제한 시기는 이괄의 난이 있었던 인조2년(1624)으로,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그가 치루었던 과거(科擧)는 이괄의 난 중에 공주에서 실시한 공주행재정시문과(公州行在庭試文科)였다.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인재등용과 민심수습을 목적으로 실시한 이 시험에서 홍익한은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과거 급제 후 정6품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로 관직생활을 시작한 홍익한은, 그 후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섭렵하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에는 정4품 벼슬인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그가 관직에 있는 동안 국제정세는 급박하게 변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 조선의 국력이 소진되는 틈을 타서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누르하치에 의해 통일된 여진족은 나라이름을 후금(後金)이라고 하고 쇠잔한 명나라를 압박하면서 조선에도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과 북인정권은 성리학적 명분보다는 전란(戰亂) 후의 조선의 현실에 주목하여, 내부적으로는 전후복구에 주력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유연성 있는 정책을 펴나갔다. 하지만 인조반정(仁祖反政)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정권은 입장을 달리하였다. 광해군정권의 중립외교노선을 비판하고 친명배청(親明背淸)을 명분삼아 정권을 장악한 이들은, 대외적인 상황의 급박함을 인식했으면서도 정권의 유지를 위해 배청노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책없는 청나라에 대한 강경노선은 청(淸)의 침략을 가져왔다. 침략의 결과는 뻔했다.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던 조선은 청(淸)의 12만 군대에 밀려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의 건의에 따라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상황이 이러함도 불구하고 김상헌, 김집, 이정구 등 집권 서인 강경파는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척화파의 중심에 홍익한을 비롯하여 삼학사(三學士)가 있었다. 청(淸)은 화친조약을 반대한 김상헌과 삼학사(三學士)를 청(淸)의 수도 심양으로 잡아갔다. 심양에 잡혀가서도 유혹과 협박에 뜻을 굽히지 않던 삼학사는 끝내 성문 밖으로 끌려나와 처형되는 비운을 맞았다.

3.홍익한의 묘와 포의각(褒義閣)

삼학사(三學士)는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큰 영화를 누린 사람들이다. 병자호란 후에도 홍익한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서인(西人)은 정권유지의 명분을 찾기 위해 대청 강경노선을 부르짖으며 명나라와 조선의 원한을 갚아야 된다고 외쳤다. 서인정권이 가능성 없는 북벌(北伐)을 외치고 반청(反淸)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데 있어서 김상헌과 홍익한을 비롯한 삼학사는 좋은 본보기였다. 북벌이 추진되던 효종, 숙종 년간에 서인정권은 김상헌과 삼학사의 지조와 충절을 만천하에 알리고 추앙하는 운동을 벌였다. 전국에는 삼학사를 배향하는 서원(書院)이 건립되었다. 이 때 건립된 서원은 홍익한의 고향 팽성읍 함정리의 포의사(褒義祠) 외에 전국에 8개나 되었다. 또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화포집", "북행록", "서정록" 등 문집이 간행되었다. 이와 함께 효종 때에는 홍익한에게 도승지, 윤집에 부제학, 오달제에게 좌승지의 관직이 추증되었으며, 숙종 19년(1663)에는 영의정이 추증되었고, 홍익한에게는 충정(忠正)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3공화국 정권에서 이순신이 성웅(聖雄)으로 추앙되었던 것처럼, 홍익한과 삼학사도 같은 입장에 선 것이다.
계양지역에 홍익한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로는 본래 함정리 서원말에 있었던 포의사(褒義祠)와 포의각(褒義閣) 그리고 그의 집과 묘(墓)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십 수 만평에 달했다는 포의사는 조선 말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되었고, 일제하와 해방 후에는 일본군과 미군의 군사시설에 수용되었다. 남아있던 포의각(褒義閣)과 홍익한의 묘(墓)는 1942년 12월 일제가 군사시설을 만들면서 묘(墓)만 본정리 꽃산 기슭으로 이장(移葬)하였으며, 신도비 등 비(碑)들은 함정리 길가에 방치되었다. 그러던 것을 1964년 지역의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해 포의각이라는 비각이 세워졌고, 1982년에 군(郡)의 예산지원으로 묘(墓)가 있는 꽃산으로 옮겼다. 죽은 후 수 백 년 동안의 추앙에 비하면 초라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름도 아름다운 꽃산 기슭 홍익한의 묘는 검소함마져 풍길 정도로 소박하다. 묘역을 둘러 싼 소나무들도 이장한 뒤 심은 것이어서 연륜이 묻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늦가을 묘역에는 하얀 억새가 스산한 느낌을 면하게 한다. "의를 기리고 칭찬한다"는 뜻을 가진 포의각(褒義閣) 안에는 홍익한의 묘갈과 묘표 그리고 그의 백부 홍대성과 아들 홍수원의 묘표가 모셔져 있다. 무덤 앞에는 오랜 세월로 이끼가 낀 묘갈이 세월의 두께를 말해준다. 묘갈 전면에는 이 묘(墓)가 충정공 홍익한과 청군에게 포로로 잡힌 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그의 부인 양천 허씨가 합장된 묘임을 말해주고 있다.
홍익한의 삶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역사의 진실성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비판의식을 갖고 역사를 볼 것을 강조하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삶이란 모름지기 자기가 살았던 삶의 분량과 진실만큼 평가를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런 측면에서 홍익한은 살아서는 자신의 사상에 충실한 정치가이며 지식인이었지만, 죽어서는 고단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고 평가된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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