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8주년특집 와이드 평택in 평택人

그의 손을 거치면

부엌문짝도 예술품이 된다

    서각장 목계 이규남

조화란 이런 것이다. 멀리 타향 귀양살이하던 선비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그린 노송은 절박함 가운데서 고고함을 잊지 않았음을 드러내었고, 그 그림을 부엌문짝에 새긴 이는 선비의 혼과 함께 소슬한 제주 바람과 파도까지 담아내고 있었다.

경기무형문화재 제40호 서각장 목계 이규남 선생의 비전동 언덕 1층 작업실에 들어서면 왼쪽 벽면에 세한도가 걸려 있다. 제주도 어느 시골집 부엌문짝으로 쓰이다가 생을 마감한 제주산 왕벚나무 문짝은 닳고 닳아 버려진 것이었다.

이규남 선생은 그 문짝 위에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새겼다. 억센 제주 바람에 가슴까지 아렸을 추사와 좀이 슬어 숭숭 구멍 뚫린 부엌문짝 신세가 어찌 그리 닮았는지 세월을 거슬러 올라 예술로 어우러졌다. 어떤 이가 세한도를 감히 부엌문짝에 새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비범한 예술 혼을 가진 이가 아니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부엌문짝마저도 예술로 태어나게 한 이규남 선생은 평생 ‘서각’에 빠져 살아왔다.

▲ 세한도

서각장, 외로운 삶 자처

인간문화재, 직업으로는 매력 없지만...

 

인생의 쓴 맛, 서각

서각은 예전에는 ‘새길 각’, ‘글자 자’, ‘각자(刻字)’라 했다. 요즘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글자를 새긴다 해서 서각이라 한다. 예전에는 목판에 찍어내기 위해 글자를 거꾸로 새겼다. 글자를 새기고 먹물을 먹여 찍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규남 선생은 목판을 찍어내기 위한 용도보다는 시각적으로 보기 좋게 해서 장식용으로 만드는 작업을 선호한다.

20 여년 전 어느 전시회에서 글자를 거꾸로 새긴 목판 앞에는 사람들이 없고, 한글이나 그림 앞에는 발길을 멈추는 것을 보고 서각을 좀 더 사람들에게 친밀하게 다가가기 위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서각은 돈도 안 되고 판매도 안 되는 작업이다. 서각을 업으로 하는 삶은 고달프다. 서각이 좋아 지금까지 해 왔다는 이규남 선생은, 다른 게 보이지 않았고, 곁에서 이해해 주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새벽 4시나 4시 반부터 시작해서 온 종일 매달려 글자를 새겨도 애기 손바닥만 하게 만들어 겨우 팔 수 있을 뿐이란다. 한 작품을 만드는데 스무 날은 보통이고, 한 달이 걸리기도 한다. 그렇게 작업 하다보면 경조사 찾아다니는 일상생활은 어림도 없는 외로운 삶을 자처해야 한다.

인간문화재라고 해서 간혹 배우려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이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배우러 왔다가 두세 달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사람들 때문에 여러 번 실망했단다. 일 년에 두세 명은 그런 사람이 있단다. 이규남 선생은 그런 젊은이들 특징은 혹시 경제적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달려들었다가 나가떨어지는 것이란다. 두세 달 경험하고 나면 직업으로서는 매력이 없다는 걸 간파하고 그만두는 젊은이에게, 서각은 여력이 있어야 버틸 수 있다고 미리 말해준단다. ‘나중에 좋은 직장 찾으면, 취미로 하라, 그때 찾아오라’ 하고 돌려보낼 때마다 전수가 쉽지 않음을 느낀단다. 다만, 목공일을 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응용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권하기도 한다.

서각은 내 숙명, 인간문화재가 되기까지

삼십 년 넘은 지금이야 약간의 주문이 있다고 하지만, 오랫동안 누군가로부터 주문받은 적이 없었다던 이규남 선생은 무슨 보람으로 서각을 했을까? 선생은 ‘서각은 내 숙명’이라고 말한다.

숙명이라고 말하는 건, 지금도 잊지 못하는 고등학교 2학년, 5월 어느 날의 강렬한 경험 때문이다. 사촌형님 결혼식이 있던 강화도에서 형님과 함께 전등사에 들렀다. 한 스님이 시주하라면서 한지 목판 인출을 보여주었을 때, 형님이 한자를 술술 읽어 내려가자, 그 스님이 목판을 갖고 나왔단다. 목판에 새겨진 글을 보는 순간, 당시 18살이던 선생은 댓돌에 고꾸라졌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나무에 새겨진 글씨를 보고 깜빡 갔으니까, 숙명이라고 본다. 그 후부터 글을 새기고 싶어 목공예학원에도 등록해 보고, 가까운 사람들 문패도 만들어주면서 서각 외에는 다른 것은 나 몰라라 하고 살아왔단다. 서각과 인연을 맺은 후, 미친 사람처럼 살았는데 길을 걸어 다닐 때 보도블록이 나무로 보일 정도였단다. 신호등 색깔도 배색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게 만드는 재료가 되었다. 그래서 선생은 운전을 꺼린다. 운전하다가도 서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 천로역정

이규남 선생은 자신이 좋아하는 서각 대중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해 왔다. 서각을 하다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하단다. 하고 나면 성취감도 있고 재미있단다. 그러나 누가 시켜서는 못하는 일이란다. 나무판에 글자를 새기는 일을 반복한 결과, 여름에도 토시를 해야 할 정도로 오른팔이 시리고, 불빛 아래서 오랜 시간 작업한 탓에 시력도 많이 나빠졌단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선생은 서각 대중화를 꿈꾸며 성동초등학교 인근에서 2년간 공방을 운영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은 팔이 저리고 시리며, 눈이 침침해질 정도로 이른 새벽부터 공들인 작품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값싼 목공예 정도로 치부했다. 그럴 때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선생은 요즘은 누가 작품 가격을 물어 보면 판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대해 “애 닳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미 초월했다”는 선생은 나중에 기회 되면 전시관을 차리고 싶다 한다. 안성만 해도 인간문화재 전수관을 갖고 전수인을 양성하는 행정 시스템이 잘 돼 있는데, 평택도 그런 시스템이 갖춰지는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를 갖고 있단다.

그런 기대를 안고 사는 선생은 요즘 각 문중에서 책 겉장에 꽃무늬를 찍어낼 때 쓰던 목판인 능화판 수집을 계획하고 있다. 형편이 여의치 않지만 사라지기 전에 자료 수집해서 옛 서각을 보존하면서 새롭게 전하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서각이 기독교 문화와도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작업도 하고 있다. 우리나라 근대 첫 번역소설인 <천로역정>에 김준근이 그린 판화 42장을 2년에 걸쳐 새기는 작업을 해 냈다. 요즘도 민화에서 칠 기법을 배우기 위해 공부한다는 선생은 평택이 문화가 있는 도시가 되려면 행정을 하는 사람의 관심과 지원, 지역신문의 꾸준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