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호흔 씨가 한글 전자족보를 펼쳐들고 강호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종중에서 족보 제작한 걸 보면 생몰연대만 나왔지, 각 사람의 생애를 아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읽지도 못하는 한자로 기록된 족보, 요즘 사람들이 보려고 합니까? 당연히 만들지도 않죠. 고향 문중 사람들에게 족보 이야기해도 호응 없어요. 우리 아이들도 고리타분하게 족보 누가 보느냐 그래요. 나도 그 나이 때 그랬어요. 1996년 마흔 무렵에, 부친께서 돌아가시고 나서야 족보를 만들 생각을 하고, 17년이 지난 올 3월에 인터넷 한글 전자족보를 직접 마무리하였으니까…”

팽성 남산리에서 태어나 평택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났다가 최근 뿌리 찾기에 여념이 없는 평택 진주 강씨, 강호흔 씨의 이야기다. 강 씨는 아주대학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80년대 초반부터 컴퓨터를 다루다 보니, 자연스레 한글 전자족보에 관심 갖게 됐다고 한다.

그런 그가 특별히 관심 갖고 살피는 이는 평택 진주 강씨의 입향조(入鄕祖)인 사양재(四養齋) 강호보(姜浩溥, 1690-1778)다. 1700년대 초반, 연천에 살던 강호보는 혼인을 하면서 처가가 있는 평택으로 이주하였는데, 이후 모친과 동생 위보(渭溥)도 옮겨 오게 되면서 평택 진주 강씨가 형성되었다.

강호보는 어릴 때부터 문장에 두각을 나타내었고, 1726년 37세에 생원시에 급제했지만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학과 주자학에 매진하였다. 비록 65세 되던 해에 모친의 뜻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여 늦은 나이에 벼슬을 하기도 했으나, 평생 주자학 연구에 전념한 정통 주자학자다.

우암 송시열, 수암 권상하, 남당 한원진으로 이어지는 조선 시대 기호(畿湖) 사림 주자학의 맥을 이었던 강호보는, 『주자대전』 및 『주자어류』 등의 방대한 주자 저술을 항목별로 분류한 『주서분류(朱書分類)』 84권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현재 74권이 남아 있는데, 조선 시대에 주자의 글을 편집·분류한 저서 중에 가장 분량이 많다. 강호보는 이 『주서분류』를 30대 후반부터 87세까지 혼자 50여 년 동안 작업하였다고 한다. 『주서분류』 외에도 1727년 부사 이세근(李世瑾)을 따라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기록인 『상봉록(桑蓬錄)』은, 한글본과 한문본이 모두 전하는 드문 사례로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이처럼 생전에 효자였고, 청빈했던 강호보는 평생 학문에 매진하며 주자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양재 강호보가 역사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것이 안타깝다”는 강 씨는, 후손들에 대한 교육적 측면에서라도, 조상의 유품과 행적을 찾아 정리하면서 평택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단다.

강씨는, “강호보가 서문을 남긴 바 있는 18세기 포도 그림 7첩을 가보로 갖고 있는데, 평택에서 강호보에 대해 연구가 진행되고 평택박물관이 건립된다면, 기증할 의사가 있다.”고 한다. 그런 차원에서 “1757년에 강호보가 『팽성지(彭城誌)』에 쓴 발문이, 『평택시사』에는 빠졌으니, 보충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냐?”고 묻는 그는, 오늘도 뿌리 찾기에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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