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해설사가 들려주는 평택 문화재 이야기⑫ 삼봉 정도전 선생 유적지를 찾아서-하

선생 장손 용인공 정래가 진위면 은산리로
이주하며 봉화 정씨 집성촌 일구게 돼

1392년 이방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나중에 태종임금이 됨)이 고려왕조를 지지하는 정몽주를 제거하자 마침내 정도전은 조준, 남은 등 50여명과 함께 이성계를 조선의 새 임금으로 추대하게 됩니다. 그는 구세력을 몰아내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조선개국의 정치·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개국일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를 거쳐 삼도도총제사 등 중요한 직을 겸임하는 등 조선의 2인자가 되었습니다.

정도전은 자신과 이성계와의 관계를 중국의 한 고조와 그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였다고 합니다. 즉 한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성계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국가 조선을 세운 것이니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는 곧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조선 경국전을 찬진하여 법제의 기본을 이루었고 한양 천도 (당시 서울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이전)하는데 실질적인 설계자가 되어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의 모든 문의 이름을 직접 짓기도 했습니다.

경복궁이 완공되자 태조 이성계는 연희를 베풀며 많은 신하들 앞에서 정도전에게 “유종공종(儒宗功宗, 유학에도 으뜸이요, 나라를 세우는 공로도 으뜸 )”글을 내리며 치하하였습니다.

정도전은 조선의  군사, 외교, 행정, 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으며 척불숭유(불교를 멀리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삼아 유학의 발전에도 공헌하였습니다. 그는 글씨에도 뛰어나 저서에 삼봉집, 경제육전, 경제문감, 심기리편, 불씨잡변 등 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정도전은 학자이자 정치가이며 철학자이며 사상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1차 왕자의 난 때 왕권정치를 이루려는 이방원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향년 58세였습니다.

문헌사는 1986년에 평택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정도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정도전 선생의 사당입니다. 고종2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한양의 설계자인 정도전 선생의 업적이 부각되고 널리 알게 되어 후손들이 그렇게도 염원하였던 정도전 선생이 공훈과 지위를 회복시키고 문헌(학문을 좋아하고 박식한 재능을 가졌다는 뜻)이라는 시호를 내리셨습니다.

또 고종께서는 친히 치제문(나라에 공이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며 내리는 글) 을 내리고 양성현 산하리에 문헌사를 짓게하고 죽산부사 이 헌경을 보내어 인근에 있는 7개 고을 수령들과 더불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 1913년에 대구에 있던 삼봉집 목판을 이곳 은산리로 이관하였고 1988년에 삼봉집 목판이 경기도유형문화재 132호로 지정 받았습니다. 또한 1994년에는 정도전 선생의 영정이 문화공보부 표준 영정으로 지정 되어 보존 해오고 있으며, 사당 건물이 퇴락하고 협소하여 2004년에 국비와 평택시비를 들여 삼봉기념관 후손들이 현 위치에 증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택시에서는 정도전 선생의 후손들과 매년 음력 9월 9일에 삼봉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추모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삼봉기념관은 2004년에 신축 개관하였는데 이곳에 그 유명한 ‘삼봉집 목판’이 판각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목판은 돌배나무로 만든 책판으로 정조 15년에 왕명으로 경상감사 정대용에게 명령하여 삼봉집의 내용을 판각하여 영구 보존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대구에서 간행한 삼봉집 판각본은 영구 보존을 위해 4대 (오대산, 태백산 , 정족산, 홍문관) 사고(나라의 역사와 중요한 서적, 문서를 보관하는 창고)에 보관 시켰습니다. 그중 완벽하게 보존되었던 정족산 사고와 태백산 사고의 삼봉집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었습니다.

현재 목판은 258판중 14판은 유실되고 현재 삼봉기념관에는 236이 보관되었으며 8판은 경기도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목판이 어떤 경로로 후손들에게 넘어갔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작고하신 종손 정병무씨의 증언에 따르면 대구 용연사에 있던 목판을 그의 조부가  마차로 이곳으로 실어왔다고 합니다. 목판의 형식은 조선시대의 다른 목판과 마찬가지로 목판 양측에 손잡이 모양의 띠를 갖고, 본문을 양각한 것으로 목판 한 장을 앞뒤로 찍으면 4페이지가 됩니다.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이기도 한 정도전의 정치. 철학사상이 망라된 삼봉집의 판각이란 내용면에서 뿐만 아니라 판각의 글씨가 정교하여 인쇄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삼봉기념관 전시실에는 정도전이 설계한 한양 설계도가 걸려 있습니다. 또 삼봉선생이 부인과 나누었던 서간문 삼봉집, 모든 훈작이 복훈되어 받은 복훈 교지, 사시교지 등이 정도전 선생과 관련된 유물과 문화재 자료가 전시되었습니다.

정도전 선생과 관련된 유물과 문화재 자료들이 이곳에 있을까?

은산리는 진위면에서도 가장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평택과 안성 용인이 접경지역입니다. 이곳은 기동, 방촌, 미동, 상리, 진목이라 불리는 자연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200호쯤 되는 큰 마을을 이루며 봉화 정씨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입니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와 살은 사람은 정도전 선생의 장손인 용인공 정래 입니다. 정래는 한성판관과 용인 현령을 지냈는데 이것이 인연인지 정치적 이유인지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착하므로 이후에 봉화정씨가 크게 번창하여 살고 있으므로 이곳 은산리에 정도전 선생의 사당 문헌사을 건립하게 된것입니다.   

 

이 광 섭 전 덕동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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