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보험인 양승수의 오똑이 인생

단순히 보험상품을 파는 세일즈맨이 되기보다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이 사회 속에 있어야 할 존재가 되고자 했다.”는 프로 보험인 양승수.

그는 항상 고객과의 약속을 생명처럼 지키며 다정한 이웃처럼 때로는 각 업종의 카운셀러로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켜 왔다.

평택에서 ‘양승수를 모르면 간첩’라고 할 정도로 보험세일로 유명인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최근 발행된 『인물저널』2001년 봄호에 게재될 정도로 전국적인 인정도 받고 있다. 영업에서도 남다른 연구를 통해 각계의 업종을 하나의 도움 관계로 엮어 만든 상생의 인적 인프라를 구축하고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됨으로써 함께 사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서로 돕고 있다.

그는 보험세일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고객 6천명이라는 경이적인 가족을 확보하게 되었고, 월평균 소득 2천만 원 이상, 연봉 2억5천만 원이라는 성공된 삶을 이루었다. 많이 벌었다는 생각과는 달리 재산은 유일한 32평 아파트 한 채 뿐이라고 한다. 그동안 그가 번 돈은 모두 영업활동과 사회활동 등에 쏟아 부었다. 지금도 각종 후원금으로 장애인과 불우 청소년 등 가난한 이웃을 돕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후학들에게 장학금 지원도 하고, 헌혈 5회, 서울대에 사후 시신기증도 해놓았다.

그는 평택 팽성읍에서 1965년 1월 21일 출생한 이후 지금까지 최고를 향한 프로 승부사의 길을 일관되게 걸어왔다. 어린 시절 부친의 사업실패로 중학생 때부터 신문을 돌려 생활비를 충당하고 장학생으로 학비를 대신하는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줄곧 반장과 학생회장을 맡으며 우뚝 선 자신을 만들어 왔다. 그 당시 그가 금오공고에 들어간 것도 가정형편상 당연한 수순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돌련 고3때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수행과 독학의 길을 걸었다. 다행히 사찰주지의 선처로 오히려 고향의 고교에 전액장학생으로 다시 편입하게 된다. 졸업 후에도 그의 격정 인생은 계속되어, 포장마차, 막노동, 세차장, 공장생활 등을 하며 사회 밑바닥부터 많은 체험을 거쳐왔다. 그는 군복무 중에도 훈련병 성적 1등, 일반하사 교육훈련 사단 1등을 하는 등 최고를 향한 도전을 해왔다.

제대 후 사업가의 길을 걷기 위해 우선 영업 최전선에서 뛰던 중 선배의 소개로 시작한 게 보험세일즈로 그의 역량은 마음껏 발휘하게 된다. 그는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오직 최고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그 결과 전국 1위를 3회, 대상을 2회 수상할 정도로 보험업계의 명실상부한 1인자의 자리를 굳혀왔다.

그는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되고, 방법이 없으면 찾으면 된다.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해 깨끗이 살자. 검이 짧으면 일보 전진하고 조건이 불리하면 노력을 배가하라.”는 자신의 좌우명처럼 그는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 왔다고 한다.그가 앞으로 펼쳐갈 행보가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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