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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항일운동가 원심창선생과 상해육삼정의거를 기억하자황우갑 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
평택시민신문 | 승인 2009.03.25 00:00

[평택시민신문]

   
▲ 황우갑
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
3월은 봄의 시작이자 태극기와 나라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절이다. 우리 고장 평택에는 나라가 어려웠을 때 그 정신과 기개를 지키고자 노력했던 몇 분의 어른들이 있다. 병자호란기 삼학사 가운데 한분인 홍익한 선생의 고향이 평택이며, 추담오달제선생께서 어려서 수학한 곳이 이충마을이다.

평택은 삼학사의 고장이다. 또한 민세 안재홍은 청년외교단사건, 신간회 운동, 조선어학회사건 등을 주도하며 일제강점하에서 국내항일운동의 핵심인물로 활동했다. 평택은 민세가 꿈꾼 “고루 윤택한”의 평택정신 “평택”이라는 도시이름 속에 살아있는 고장이다.

이분들과 함께 앞으로 평택의 자랑으로 재조명받아야 할 분이 아나키스트 항일운동가 원심창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원심창선생께서 다니셨던 성동초등학교에는 선생의 항일정신을 알리기 위해 동상이 세워져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분의 항일활동이 알려져 있지는 않은 듯하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도 원심창 선생과 그가 주도했던 1933년 3월 17일 상해육삼정의거가 항일운동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올해는 상해육삼정의거 76주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원심창 선생은 우리고장 평택에서 태어나 성동초등학교를 다니고 1919년 3·1운동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3년 박열등이 결성한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셨다. 1924년 8월 무정부주의 최초의 노동조합인 동흥노동조합에 가입하였고, 1925년 북경과 상해등지에서 무정부주의운동을 전개하셨다.

1926년 5월에는 무정부주의의 실천을 위해 기관지《흑우》를 발행하여 홍보하였고, 1927년 흑풍회, 1928년 흑우연맹결사에 참여하셨다. 1929년 4월 일본 도쿄유학생학우회의 폭력사건으로 징역 3월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갔다. 같은 해 4월 정화암·백정기·이회영등과 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고, 6월 흑색공포단에 가담, 1932년 11월 톈진일본영사관과 일본군 병사를 폭파할 것을 모의하는 등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3월 일본 육군대신 황목정부를 중심한 일본 군벌은 주중공사 유길명에게 4천만원을 주고 열하성을 근거로 반만항일유격전을 전개하고 있는 의용군과 한족의 항일독립군을 공격하고 탄압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협력하기 위해 부일분자와 고급 장성을 매수하려는 비밀회의가 상해 공동조계에 있는 육삼정이란 고급 요리점에서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흑색공포단은 1933년 3월 5일 의사의 숙소인 상해 프랑스조계 정원방(亭元坊)에서 정화암, 원심창, 엄순봉, 이강훈이 회합하여 시국을 분석하고 그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육삼정을 습격하여 유길명 등을 처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원심창선생은 참모로서 적의 동정과 현장의 조사 등을 맡기로 하고 유자명, 오면직, 정화암 등은 거사일인 17일까지 은밀히 만전의 준비를 서둘렀다.

무기는 윤봉길의사가 백천대장(白川大將) 등을 처단했을 때 사용한 것과 똑같은 대형폭탄을 선택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후 김구주석이 상해를 떠나 가흥으로 이동할 때 오면직에게 맡긴 폭탄 2개를 비롯하여 중국인 왕아초와 화균실로부터 권총 2자루와 탄환 20발 그리고 수류탄도 1개 더 준비하였다. 그리고 백정기 의사와 이강훈은 폭탄투척 연습으로 거사에 실수가 없도록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하였다. 일본군 수뇌들이 육삼정에서 회합을 갖는 것은 3월 17일 오후 9시부터 11시까지이므로 이 시간대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거사일인 3월 17일 오후 6시 남시(南市) 진진다관에서 차를 마신 두 의사는 유자명, 오면직과 "죽어 저승에서 만나자"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이규호가 불러온 차에 의사와 이강훈, 원심창 등 5명이 함께 타고 조계를 넘어 동일 오후 8시경에 현장 부근에서 내렸다. 백정기 의사는 육삼정 건너 무창로271호 중국요리점인 송강춘2층으로 올라 가고 이강훈은 중국 옷에 과모를 쓰고 대형폭탄을 옆에 낀 채 절름발이로 행세했다.

이날 백정기 의사는 자세한 현장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일본인을 만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일본인은 육삼정 부근에서 유길명공사가 출발하는 것을 감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 일본인은 일본 영사관에서 그가 백정기 등과 접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밀정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일본측은 백정기 등 동지들을 체포하려고 그를 설득하여 과거의 죄과를 덮어주고 경제적인 편의를 제공해 주기로 하고 계획적인 음모를 꾸며 그를 통하여 유길명 공사 등 살해계획을 알아낸 다음 육삼정 부근의 인력거꾼에서부터 식당의 종업원까지 형사로 변장시켜 사전에 배치하였으니 이날 갑자기 덮친 일본 영사관의 좌백(佐伯)과 등정(藤井) 경무보등 10여 명이 갑자기 덥쳐 손 쓸새도 없이 붙잡혀 거사를 이루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백정기 의사는 일본 장기로 압송되었다.

일본 장기법원(長崎法院)에서 백 의사와 원심창선생은 무기징역을 이강훈선생은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았으며, 백정기의사는 옥고중 1934년 6월 5일 천추의 한을 가슴에 품고 향년 39세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백정기의사의 유해는 해방후 김구 선생 등의 노력으로 현재 효창원에 모셔져있다.

원심창 선생은 신채호, 박열 등과 함께 한국 아나키스트운동의 핵심인물이자 해방후 일본 민단창립시 사무총장으로 재일한인 민족운동의 핵심인물이기도 했다.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일에는 다양한 수단과 방법이 있겠지만 우선 항일운동에 헌신했던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선양하는 “상징적 국가보훈정책”이 절실하다. 최근 국제화중심도시를 지향하는 평택에서 지역정체성을 바로세우기 위한 역사인물 재평가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고있다. 마땅히 조명되어야 하나 조명 받지 못한 원심창 선생과 같은 분들에 대한 재조명 사업도 이제부터 적극 전개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것이 평택의 과거로부터 미래를 만들어내는 길이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울때 우리가 진정으로 잃지 말아야 할것은 이땅과 이나라를 찾고 지키기 위해 노력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이며, 이는 우리가 후대에 계승해야할 핵심가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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