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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덕면 당현리에 은둔한 덕원군 이서(李曙)세조의 세째 아들로 예종시대 남이장군 옥사에 관여하며 2등 공신 책봉 영화누려
평택시민신문 | 승인 2001.12.27 00:00

[평택시민신문]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28

김 해 규 (한광여고 교사)


1.종덕장이 있던 마을 당현리

고덕면 당현리, 두릉리일대는 고려시대 종덕장이라는 장원(莊園)이 있던 지역이다. 장원은 농장(農場)이나 전장 또는 별업(別業)과 같은 것으로 왕실이나 귀족, 사원들이 사적(私的)으로 지배했던 대토지를 말한다. 고덕면의 종덕장은 왕실이나 궁원 소유의 토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왕실소유라고 해도 직접 경영보다는 조세를 징수하는 수준의 토지였으므로 지배형태는 느슨한 편이었다. 왕실은 종덕장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하기 위하여 종덕창(宗德倉)이라는 조창(租倉)을 세웠다. 종덕창의 존재는 고려 무신정권기에 있었던 진위민란에도 등장한다. 고려사에는 민란의 주동자였던 이장대와 이당필, 김예가 진위에서 봉기한 뒤 종덕창의 세곡(稅穀)을 군량미로 확보하기 위하여 이 곳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기록대로라면 종덕창은 종덕장의 세곡(稅穀)을 보관하는 창고였고, 종덕장은 왕실이나 궁원 소유였을 것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면 종덕창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조창의 세곡은 수로(水路)를 통하여 운반하였으므로 동청리, 두릉리와 인접한 동청나루 부근이었을 것이다. 동청나루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다라고비진이라는 큰 나루였는데, 지금 동탄교가 지나가는 아래쪽에 있었다.

종덕장은 고려 말 사전(私田)이 개혁되고 조선 태종 때 행정구역이 정비되면서 양성현 종덕면으로, 1895년과 1896년의 행정구역 개편 후에는 수원군 종덕면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에는 종덕초등학교라는 이름과 종덕제라는 사우(祠宇)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땅이름이라는 것은 민중들의 생활문화여서 한 번 만들어지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속성이 있다. 나는 사람들과 땅이름을 갖고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은데, 많은 사람들이 땅이름을 풍수지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을 본다. 사실 풍수지리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1천년이 넘었고, 국가와 지배층 사이에 널리 퍼졌기 때문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볼 수 는 없다. 하지만 일반 민중들의 터전인 마을이름까지 풍수지리에 빗대어 지을 만큼 국가권력이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마을과 계곡의 땅이름들은 대부분 민중들의 생활과 정서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문화이다. 내 기억에도 초등학교 시절 10리가 넘는 길을 걸어 학교에 다니며 우리들은 곳곳에 이름을 지어 놓았었는데 30년이 다 된 지금도 대부분 그대로 불려지고 있는 것을 본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름이 "공사중"과 "마량바람"이다. 공사중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우리마을로 들어오는 신작로를 건설하면서 "공사중"이라는 팻말을 꽂아 놓은 것에서 시작되었고, 마량바람은 학교갔다 10리 길을 걸어오던 우리들은 장승백이 고개를 넘어 서낭당(서낭댕이) 고갯마루를 올라서야 마을(마량리)에 갈 수 있었는데 이 고갯마루에 불던 시원한 바람에 우리가 붙여준 이름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았더니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불렀고 심지어 마을 어른들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당현리 청룡말에는 덕원군 이서(李曙)의 묘(墓)가 있다. 덕원군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왕족이며, 전주 이씨 덕원군파의 파조(派祖)이다. 묘(墓)는 해발 5, 60미터쯤 되는 지석산과 수영산을 비롯하여 일곱 개의 봉우리가 주산과 안산 좌청룡 우백호를 하고 있는 곳 가운데 있다. 묘역(墓域) 앞으로는 포실하게 보이는 앞고실골 들이 펼쳐졌다. 묘의 위치가 서향인 것만 빼고는 문외한의 눈에도 명당(明堂)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왕족의 묘(墓)는 종친부에서 관할했기 때문에 아무 곳에나 쓰지 않았다. 경기도에 있어야 하고 왕실의 위엄이 서려야 했다. 그렇다면 덕원군의 묘는 왜 이곳에 있게 되었을까? 오늘 우리답사의 출발점이다.

2.덕원군은 누구인가?

덕원군 이서(李曙)에 관한 기초자료를 얻기 위해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을 찾았더니 내용이 무척 소략하다. 심지어 그의 생몰 연대조차 나와있지 않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찾았다. 실록의 내용을 간추려서 프린트를 했더니 무려 20장이 넘는다. 사람들은 흔히 역사책에 이름 석자가 올라가기를 바라고 사는데, 20장 분량의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은 덕원군이라는 인물이 정치적으로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자료를 대충 거둬들고 묘(墓)가 있는 당현리 답사에 나섰다. 청룡말에 덕원군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마을에 들어갔더니 날씨가 추워서인지 지나가는 사람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수소문 끝에 인터뷰에 성공한 이우학(82) 옹도 선조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고 했다. 족보를 살피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우리나라 족보라는 것이 시조(始祖)나 파조(派祖)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다지 유용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에 그만두었다.

기록에 의하면 덕원군은 세조의 셋째 아들이다. 세조는 왕비 윤씨에게서 의경세자와 예종을 낳았고, 귀인 박씨(나중에 근빈에 봉함)에게서 덕원군과 창원군을 얻었다. 그러므로 덕원군은 적자가 아닌 서자(庶子)인 셈이다. 실록에서도 그의 생몰 연대는 알 수 없는데, 세조 8년 8월의 기록에 덕원군의 집을 구입하면서 예조에서 60여 간(間)이나 되는 큰집을 구한 것을 노사신이 비판한 내용이 있는 것을 볼 때 세조 2년(1456년) 전후가 아닐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서(李曙)가 덕원군에 봉해진 시기가 세조 4년이며, 귀인 박씨가 본래 궁인(宮人) 출신이었고 궁인을 후궁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세조가 왕이 된 다음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덕원군은 어려서 의경세자와 돈독한 관계였다. 세자의 생일에 초대된 것은 물론이고, 매사냥을 할 때도 동행하였다. 그러나 의경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고 동생이었던 예종이 즉위하였다. 예종 때 덕원군은 즉위년 10월에 있었던 남이장군의 옥사(獄事)에 왕실의 종친으로서 적극 관여하여 2등 공신(功臣)인 수충보사정난익대공신에 올랐다. 조선이 왕족이나 외척의 정치개입을 적극 견제하였다고는 하지만 공신(功臣)으로 책봉되면 본인 뿐 아니라 조상과 후손들에게까지 부귀와 영화가 보장되게 마련이다. 예종 1년 5월에 덕원군은 공신(功臣)에 대한 포상으로 영정이 그려져 각(閣)에 보관되고, 반인(伴人) 8명, 노비 10명, 구사(丘史) 5명, 전지(田地) 1백결, 은 25냥, 표리(表裏) 1투, 내구마 1필과, 역적으로 몰린 민서의 첩 중비와 문치빈의 첩 눌가의 딸 문용비를 받았다.

덕원군의 입지(立志)는 성종이 즉위한 다음에도 줄지 않았다. 성종 1년에 이조판서 권맹희가 왕족들의 역할을 평가할 때 "다른 왕족들이 덕원군과 같다면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라고 평하고 있는 것에서 일면이 파악된다. 그러나 성종 3년에 방호련, 김효동 등 3천여 명과 함께 회암사에 가서 불공을 드린 것이 문제가 되어 입방아에 오르내리면서 내리막 길을 걷는다. 짐작할 때 평택지방에 은거한 것도 이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성종 때는 유교정치이념이 정착되는 시기여서 사대부나 왕족의 성리학 외에 다른 사상이 용납되지 않던 시기였다. 그러나 왕은 왕실의 체통 때문이었는지 방효동 등은 처벌하였지만 왕족인 덕원군과 창원군은 삼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처벌하지 않았다. 하지만 덕원군은 자신이 주도한 일에 방호련 등만 처벌받은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적극적인 구명운동을 벌였다. 구명운동이 또 문제가 되었지만 이번에도 왕의 무마로 무사히 넘어갔다. 이와 같은 일을 겪으면서 덕원군은 정치에 회의를 느낀 것 같다. 실록에는 덕원군이 언제 죽었는지 나와 있지 않다. 보통 조정의 고위 관료가 죽으면 실록에 졸기라고 해서 일생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는데 덕원군에게는 그런 것도 없다. 하지만 성종 5년 10월 덕원군의 아내에게 부의(賻儀)로 쌀과 콩 40석과 종이 1백 권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쯤 죽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3.덕원군 묘가 청룡마을에 있게 된 까닥

조선시대에 왕족 뿐 아니라 명문 사대부 집안의 묘(墓)자리는 사회적, 경제적 기반과 관련이 깊다. 조광조가 이충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은 집안의 장토(庄土)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며, 도일동의 원씨 묘역에 이성부 장군의 묘가 있는 것도, 원씨 가문이 그의 외가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묘(墓)는 묘의 위치와 뭍힌 사람의 사회, 경제적 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덕원군의 묘는 왜 당현리 청룡말에 있게 된 걸까.

필자는 이 문제의 열쇄가 덕원군이 예종 때 공신전으로 받은 토지 100결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청룡말에서 만난 이우학(82세)나 이우신 옹은, 본래 이 마을에는 전주 이씨들이 살지 않았고 화성군 동탄면 가재울과 평택시 청룡동에만 있었기 때문에 아닐 거라고 하지만 이 말을 사실로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동족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높게 잡아도 17세가 후반이며 일반적으로 영조, 정조 때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덕원군이 공신전으로 당현리 주변의 땅을 받았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곳이 고려시대 종덕장이 있었고, 그 토지가 조선시대 왕실토지로 계승되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공신전은 역적으로부터 몰수한 토지나 왕실의 토지를 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왕족이이었던 덕원군에게는 옛부터 왕실의 토지였던 종덕장(宗德莊)의 땅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덕원군의 호가 당현리 주변의 옛 이름인 종덕암(宗德庵)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율곡이나 퇴계처럼 자기 동네의 이름이나 골짜기를 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것은 덕원군이 말년에 장토(庄土)가 있는 종덕(宗德)을 자신의 은거지로 삼았다는 증거가 된다.

덕원군의 묘는 조선 후기가 되면서 실전(失傳)된다. 실전의 원인은 아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조선 후기 어느 시기에 다시 찾아진다. 후손들에 의하면 평택시 청룡동에 살던 후손들이 매 사냥을 왔다가 현 묘역에서 묘비를 발견하고는 주변의 땅을 사들여서 묘를 다시 쓰고 종중 답을 만들어 관리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설(?)은 우리나라의 명문가문이라고 하는 집안에는 한 두 가지씩 있다. 사실 가문의 내력을 따지고 조상을 극진히 섬기기 시작한 것은 대부분 영, 정조 때 이후이다. 후손들의 필요에 의해서 조상이 필요해진 이 시기에 조상이 묘를 찾게 되는 과정을 담은 전설은 뼈대있는 집안에 선민의식과 신비감을 더해주었을 것이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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