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출신으로 현 고등학교 교과서에 안견과 나란히 등장하는 조선전기 대표화가
김 해 규 (한광여고 교사)
1.신분제 사회에서 하층민이 출세한다는 것
"난세에 인물 난다"는 말이 있다. 지배체제가 한 번 굳어지면 피지배층이 지배층이 된다는 것은 거의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구조가 고착화된 요즘에도 그렇지만 계급중심의 봉건사회에서는 더했다. 그래서 가난한 민중들이나 핍박받는 민중들은 혼란기에 꿈을 꾼다. 혼란기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가능성"이라는 날개를 달고 오기 때문이다. 고려 무신정권기에 신분해방을 꿈꿨던 만적이 그랬고, 조선 말기에 봉기한 동학농민군들이 그랬다.
하지만 조선 전기사회는 하층민이 꿈을 꿀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건국 후 60년이 넘어서면서 지배체제는 자리잡혔고, 지배층은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더구나 사대부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배층은 학문적, 신분적인 프라이드가 무척 강했다. 그들의 틈새를 비집고 신분상승을 꿈꾸는 것은 고행을 감내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현실에서도 신분상승의 꿈을 이룬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눈에 띄는 인물이 세종 때의 장영실이다. 장영실은 아산의 기녀(妓女) 소생으로 부산 동래의 관노비(官奴婢)였다. 노비신분임에도 축성, 제련 등 과학적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세종에게 발탁되어 노비신분에서 벗어났다. 노비에서 벗어난 장영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세종 때의 과학적 성과들이 대부분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업적만큼 벼슬도 높아져 상호군(上護軍)이라는 높은 벼슬을 누렸다. 하지만 지배층은 이런 장영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왕이 타는 수레를 잘못 만들어 부서지게 하였다는 작은 죄목으로 파직을 시키고 장형(杖刑)에 처했기 때문이다.
장영실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최경(崔涇)이 그런 사람이었다. 최경은 안견과 함께 세종, 세조, 성종 때 활약한 화가이다. 안견이 산수에 능했다면 최경은 인물화에 능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는 염부(鹽夫)의 자식으로 그림에 능해서 화원이 되었던 인물이다. 장영실이 자신의 재주와 능력으로 출세를 했듯이, 최경도 그림이라는 능력으로 크게 출세하였다. 장영실처럼 최경도 지배층의 견제와 질시를 뚫고 지배체제에 편입된 인물이다. 그러한 최경(崔涇)의 묘(墓)가 평택시 도일동에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원주 원씨뿐인 이 마을에서 수성 최씨의 묘역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지만 분명 묘비에는 최경(崔涇)이라는 글자가 뚜렷하다.
2.화원(花園)으로 당상관에 오르다
화가를 양성하고 선발했던 도화서(원)가 설치된 것은 조선이 건국되면서부터였다. 도화서의 정원은 20명으로 책임자인 제조는 예조판서가 겸직했고, 그 밑으로는 종6품의 별제가 있었는데 이 직책도 사대부 중에서 맡았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는 화원(畵員)이 되어도 제대로 된 관직은 맡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대우받지 못했던 화원(畵員) 중에서 가장 출세한 인물이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를 그렸던 안견이었다. 안견은 정4품 벼슬인 호군(護軍)을 역임했는데, 이 기록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크 맥과이어의 70개 홈런이 불과 2, 3년 만에 베리 본즈에게 깨졌듯이 안견의 기록도 비슷한 시기의 최경에게 쉽게 무너졌다.
최경은 출신부터가 모호하다. 실록에는 "안산지방의 염부(鹽夫)의 자식인데 어려서부터 그림에 출중한 재능을 가졌다"고 기록되었다. 실록의 다른 기록을 보면 최경이 출세한 뒤 스스로 출신을 감추려고 했다지만, 출신과 계급을 분명히 했던 조선시대에 이 기록은 정확하다고 할 만하다. 조선이라는 계급사회에서 염부(鹽夫)의 자식으로서 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장영실이 관노(官奴)의 신분에서 출세하였지만 그것은 예외 중의 예외에 속하였다. 최경은 어려서부터 화원(畵員)을 꿈꿨을 가능성이 많다. 실록에는 그가 어려서부터 아이들과 놀면서도 소의 채찍으로 땅에다 인물이나 동물의 형상을 그렸는데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낼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노인들은 "이 아이는 그림으로 출세할 자이다"라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뛰어났던 그의 재능은 중앙에까지 알려져서 도화원의 생도가 되었다. 생도가 되면서 최경은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화원의 업(業)에 정진하여 여러 번 승진을 하였다는 기록이 실록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인물화는 화원 중에서도 출중하였다. 그래서 세종 비(妃)였던 소헌왕후와 세조의 어용을 그리는 기회를 잡았고 그 후에도 예종과 덕종의 어용까지 그렸다. 왕의 어용을 그리는 것은 화원으로서 당대 최고임을 인정받는 일이었고 그에 따른 명예가 주어졌다. 승진에 승진을 거듭한 그의 관직은 성종 때가 되면서 벌써 안견의 수준을 뛰어넘어 사대부들만이 제수받을 수 있던 도화원 별좌가 되었다. 별좌는 도화원을 책임지던 2명의 별제 중에서 대표자였으며, 여기에 화원(畵員)을 선발할 수 있는 제거(提擧)라는 직책까지 받았다. 성종 3년에는 역대 왕과 왕비의 얼굴을 모사하였다는 공로를 들어 당상관을 제수하였다. 하지만 출신이 비천한 화원이 당상관에 오른 것을 사대부들은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사간원이 당장 문제삼고 나선 것이다. 왕도 더 이상 최경을 감쌀 수 없어 승직(昇職)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최경에 대한 성종의 애정이 지극했던지 성종 21년 9월(1484)에 끝내 절충장군 사과(司果)라는 서반직으로 당상관에 승직을 시켰다. 이로써 최경은 화원으로서 유래없이 당상관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성종의 최경에 대한 총애는 특별한 인연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성종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구중궁궐에서 냉철한 어머니 인수대비 밑에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성종은 아버지 덕종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형님인 월산대군의 집에서 아버지의 영정을 대면하게 되었다. 그 그림은 최경이 그린 것이었다. 그림 한 장으로 성종은 최경이라는 사람을 고마운 존재로 기억하게 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최경이 정치적으로 출세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3.그의 후손들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화원출신의 화가로 안견과 함께 최경을 들고 있다. 상, 하권을 합해서 500쪽이 안 되는 교과서에 이름 석자가 올라간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그만큼 그의 능력은 출중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는 능력보다 신분이 우선이었다. 그가 아무리 당상관까지 올랐어도, 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어도 사대부들은 그에게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고 했다. 실록에는 그가 권력을 탐하고 아첨을 일삼았다고 전한다. 또한 출신의 미천함을 가리기 위하여 부모, 형제를 외면하고 명문가의 자손임을 떠벌린다고 적고 있다. 물론 출신의 미천함은 그에게 커다란 콤플렉스였겠지만 이와 같은 내용은 지나친 폄하(貶下)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최경이 평택으로 이주한 시기는 대체로 세조 때라고 알려졌는데, 이주 동기도 그와 같은 신분적 한계에서 벋어 나려는 목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처음 자리잡은 동네는 현재 묘가 있는 도일동이라고 판단되는데, 왜 하필이면 도일동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평택으로 이주한 뒤 그의 후손들은 최경이 콤플렉스를 벗어 버릴 만큼 크게 성장했다. 송탄시사에 보면 최경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평택지방 수성 최씨 양 계보인 안양공파와 가산공파를 이루었다. 안양공파의 파조(派組)는 잘 알려진 것처럼 세조 때 인물인 수성군 최유림이다. 그는 세종 32년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원종공신 2등에 올랐고, 나중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적개공신 3등에 녹훈되었으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까지 올랐던 인물로 수성 최씨가 내세우는 최고의 인물이다. 또 그의 아들 최자반은 오좌동 뒷산에 모정을 짓고 조선 전기 평택지방의 큰 인물이었던 최수성, 우남양, 조광조 등과 교유하였던 사람으로, 평택지방 성리학의 대표적인 학자 중에 한 명으로 짐작되는 인물이다.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을 통하여 나를 비춰본다(가르친다)"는 뜻의 이 말은 역사적 인물을 답사할 때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물답사는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를 공부하는 과정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올바른 자세를 배우는 과정이다. 글을 맺으며 나는 최경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역사/문화기행>
평택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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