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원평동 일원 1904년 경부철도역 건설되며 옛 읍내면 누르고 교통 물산 신흥 중심지로 발전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 - 25

김 해 규 (한광여고 교사)


황무지에 세운 근대도시

10월도 다 지나가는 마지막 주 토요일 원평동 답사를 나섰다. 지금까지 1년 반 동안 시민신문에 기행문을 연재를 하면서 밀린 숙제처럼 남아있던 평택의 옛 시가지(市街地)를 돌아보고 싶어서였다. 군문 고가다리를 넘어 군문나루터를 먼저 답사한 뒤 옛 역전(驛前)거리로 발길을 돌렸다.

평택시는 1904년 10월 경부선 철도가 건설되면서 형성된 근대도시이다. 본래 이곳은 진위군 병파면 지역으로 군문포리, 통복리, 화촌리 같은 작은 마을이 몇 있는 황무지였다. 경부선 철도가 건설되면서 일제는 이곳에 철도역을 두었다. 철도역은 일제의 자원수탈에 용이하고, 조선에 거류하는 일본인을 보호하고 후원하기 좋은 요지에 설치하였다. 일제가 병파면 통복리 근처의 황무지에 역사(驛舍)를 설치한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역(驛)의 이름을 "평택역"이라고 붙인 것도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었다. 이곳은 진위나 구 평택현(팽성읍)처럼 행정의 중심지도 아니었고, 소사나 갈원과 같이 교통과 상업의 중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의 생각은 조선사람들과 달랐다. 식민지 초기 일제가 가장 필요로 하는 자원은 쌀이었다. 일제의 눈에 전통의 교통시설이나 상업지역은 식량수탈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곳은 토착세력의 힘이 강해서 일본인 이주자들이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았고 그만큼 식량수탈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안성천 주변의 황무지는 달랐다. 이 땅은 일제 강점 이전부터 황무지 개간권, 철로주변의 토지와 역둔토 수용과 같은 방법으로 일찌감치 토지를 확보해 둔 곳이었고, 토착세력도 없는 곳이었다. 이와 함께 군문포를 통하여 서해안의 수운(水運) 및 포구와 연계할 수 있는 이점도 매력이었다. 서해안의 수운(水運)과 해산물은 당시만 해도 일제나 일본인의 입장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실제로 평택역이 설치될 때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역사(驛舍)를 동쪽에 둘 것인가 서쪽에 둘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 서쪽에 두자는 쪽은 서해안의 수운(水運)과 해산물을 염두에 둔 세력이었고, 동쪽에 두자는 쪽은 안성지역의 농산물을 중시한 세력이었다. 하지만 토착세력이 강고하고 일본인의 침투가 쉽지 않았던 동쪽보다는, 수운(水運)의 이점에다 황무지와 역둔토, 궁방전 등이 많았던 서쪽지역이 일본인들에게 더 유리하였다. 이제 진위군 병남면의 황무지는 최첨단 근대시설인 철도역의 중심이 된 것이다.

평택역이라는 이름과 혼마찌

평택역(平澤驛)이라는 이름은 특별한 의미 없이 붙여졌다. 조선 후기만 해도 군문포가 평택현 땅이기는 하였지만,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위현과 평택현 그리고 수원과 직산 땅이었던 평택 서부지역이 진위군으로 통합된 뒤여서, 행정구역으로 볼 때 평택역보다는 "진위역"이라고 해야 옳았다. 하지만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철도역이 건설되자 평택과 주변지역은 일대 지각변동을 하였다. 기존의 운송로들은 철도에 대한 보조수단이 되어갔고 방사선 형태의 넓다란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철도역 주변에는 일본인과 조선상인, 중국상인이 모여들었고 기존의 도시와는 전혀 다른 근대도시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근대도시는 일제의 의도에 따라 평택과 주변지역에서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군사적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1915년에 일제가 발행한 "경기도 안내"라는 책자에는 경기도의 저명한 시가지(市街地)로 인천, 수원, 개성, 영등포, 안성과 함께 평택을 들고 있다. 또 1904년에 간행된 "최신한국실업지침"이라는 책에서는, 일본인이 조선에 이주해서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해 볼만한 유망한 지역으로 안성이 아닌 평택을 지목하고 있다.

평택역(平澤驛)이 들어서면서 역사(驛舍)를 중심으로 시가지(市街地)가 형성되었다. 시가지(市街地)는 역사(驛舍)를 중심으로 중앙에 큰 길이 나고 좌우에 상점이 들어선 모양이었다. 이 거리를 일본인들은 "혼마찌" 또는 본정통이라고 하였다. 조선인들의 시장은 역(驛) 주변에서 비껴난 원평동 중간과 서쪽 외곽에 형성되었다. 평택시장(平澤市場)은 처음 개설된 1909년 경(또는 1913년)에는 아주 작은 규모였지만, 철도가 교통의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점차 확대되었다. 시장이 확대되면서 상품의 종류에 따라 구역이 정해졌다. 시장 중앙에는 싸전거리(쌀 시장)거 형성되었고 서쪽으로 진전거리(생선전과 주막거리), 남서쪽으로는 쇠전거리(우시장)이 들어섰다. 1920년대 후반에는 안성장을 능가하지는 못했지만 인근의 큰 장이었던 둔포장을 완전히 제압하고, 아산만과 안성천 좌우의 여러 지역을 포괄하는 규모가 되었다. 1928년 일제의 기록에는 평택장의 거래액수는 34만원으로 전국 1천 3백 여 개 장시의 상위 10%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수원, 안성과 함께 경기남부 지역의 대표적인 장시가 되었다.

도시가 발달하고 경제기반이 성장함에 따라 행정구역도 정비되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병파면의 "병"자와 성남면의 "남"자를 따서 병남면 지역으로 개칭되었던 평택시는, 역(驛) 앞의 신시가지가 발달하면서 평택리라는 신설마을로 발전하였다. 평택이 교통과 물산의 중심지가 되어가면서 그 전에 진위군 읍내면(현, 진위면 봉남리)에 있던 군청이 군문포로 임시 이전했다가 평택리로 이전하였다. 1924년에는 평택면이 신설되었으며, 1938년 10월에는 진위군을 평택군이라고 고쳤고, 1939년에는 읍(邑)으로 승격되었다. 독립된 리(里)로, 면(面)으로, 읍(邑)으로 성장하면서 우편국, 식산은행(제일은행 전신), 금융조합, 평화의원과 같은 근대시설이 자리잡았다. 이제 평택은 명실공히 주변 지역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근대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하지만 해방과 6.25전쟁 그리고 전쟁 직후의 대 홍수로 시가지는 쑥밭이 되었다. 그래서 1952년에는 군청이, 그 다음에 역사(驛舍)와 다른 행정기관, 금융기관들이 새롭게 조성되는 동쪽 시가지로 옮겨갔다. 서쪽의 시대는 가고 동쪽의 시대가 온 것이다.

추억의 거리 본정통, 싸전거리, 진전거리

원평동 혼마찌 거리에서 일제시대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50년대 초에 대 홍수가 한차례 휩슬고 지나갔고 최근 도시 재개발사업으로 대부분 철거되거나 신식건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평택역(平澤驛)이 있던 자리에는 아직도 자그마한 건물이 한 동 남아서 미군 군수품을 하역하고는 있지만, 이곳이 역(驛)이었음을 짐작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본정통 초입에서 슈퍼하는 아저씨께 혹 이곳의 역사나 지리를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사온 지 40여 년밖에 안되었다면서도 혼마찌, 싸전거리, 은행자리, 시외버스정류장 등을 가리켜주었다.

혼마찌를 벋어나 옛 싸전거리, 진전거리, 쇠전거리를 돌았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시장상인들이 대부분이었을 주민들은 상업과는 관련 없이 살고 있었다. 발전이 멈추어진 시가지는 슬럼화 되듯이 골목은 좁고 후줄근하였다. 중풍에 걸린 노인 둘이서 구멍가게 앞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데 차마 다가가서 말을 붙이지 못하겠다. 싸전거리는 1919년 3.1운동 때 평택역 앞의 만세시위를 생각나게 한다. 이 시위를 주도했던 사람은 비전리에 살던 쌀장수 이도상이었다. 그는 만세시위로 투옥되어 고초를 겪고 풀려났는데, 그 후의 행적은 알 수가 없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데 어디서 밥술이나 얻어먹고 사는지...

싸전거리는 30, 40년대 인근에서 안성과 함께 가장 큰 쌀 시장이었다. 평택의 쌀 시장이 번창하게 된 것은 소사벌에서 오성들까지 광활한 습지가 일제에 의해 개간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산된 쌀들은 달구지와 배에 실려 군문주공아파트 자리에 있었던 큰 정미소에서 정미되어 이 곳에서 거래되었다. 싸전거리가 쌀을 집산하고 판매하는 곳이었다면 진전거리는 생선전과 주막이 있던 곳이다. 이 곳의 생선은 주로 아산만에서 잡히는 강다리, 황새기, 꽃게와 소금, 새우젓 같은 것이었다. 이 생선들은 안성천 변에서 어업을 하던 권관리, 신왕리, 덕목리, 길음리, 당거리 사람들이 잡아왔다. 이들이 잡은 생선이 군문포로 들어오면 중도아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평택장으로 실어왔다. 진전거리에는 생선전 뿐 아니라 주막집도 있었다. 주막집에서는 술도 팔았지만 국밥도 팔았다. 그래서 상인들이나 짐꾼들, 장보러 온 장꾼들이 이곳에서 선지국밥 한 그릇에 허기와 피로를 풀었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기도 하였다. 쇠전거리는 평택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쇠전거리에는 우(牛)시장 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함께 팔았다. 하지만 시장이 1950년대의 대규모 물난리 후 통복천 변으로 옮겨가면서 싸전거리, 진전거리, 쇠전거리는 지명만 남은 추억의 거리가 되었다. 영광이 사라진 무대는 쓸쓸하기만 하다.

80년된 집에서 40년을 살아온 사람

평택초등학교 쪽에서 돌아오는 길에 본정통에서 일제시대 다다미 건물을 하나 만났다. 한성기계세탁이라고 양철간판을 붙인 집이었는데 무척 반가웠다. 우선 사진을 몇 장 찍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아저씨는 머리에 포마드를 바른 깔끔하고 세련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먼저 내 소개를 한 뒤, 얼마쯤 된 건물이냐고 물었더니 약 80년쯤 되었다고 했다. 80년이면 1920년대 초 건물이므로 대략 도시가 형성되던 초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그 때는 최신식 다다미 건물이라고 구경꾼도 많았을 터인데, 지금은 내려앉는 지붕을 작은 기둥으로 괴여놓았다.

자신을 김태형(70)이라고 소개한 세탁소 주인아저씨는 언뜻 보기에 50대 후반쯤으로 생각될 만큼 젊어 보였다. 내가 젊게 사는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큰 욕심 안 부리고 즐겁게 일하니까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한다. 아저씨는 고향이 천안인데, 이 곳에 들어와 세탁소를 한 것은 한 40년쯤 되었다고 했다. 40년이면 60년대 초반이어서 "그 때에도 이 마을에서 세탁하는 사람이 있었냐"고 의아해했더니, "많지는 않았지만 먹고 살만큼은 되었지"라며 웃으셨다. 조금 있다 주인 아주머니가 나와서 이야기를 거들었다. 아주머니 말로는 처음 이곳에 세탁소를 운영하면 미군들도 있고 해서 돈벌이가 잘된다는 말만 믿고 들어왔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지만 아이들 키우고 밥 먹고살았으니 불만은 없노라고 하였다.

한성기계세탁소 앞 건물은 옛 평화병원자리이다. 평화병원은 해방 후까지도 이 지역에서 하나밖에 없는 근대식 병원이었다고 한다. 병원은 없어졌지만 사람들은 지금도 그곳을 평화병원이라고 불렀고, 건물에서 장사하는 집들도 평화통닭, 평화슈퍼와 같은 상호를 쓰고 있었다. 한성기계세탁소와 함께 원평동의 일제시대 건물로는 옛 식산은행 금고가 있다. 이 금고는 지금 개인 집 창고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워낙 단단하게 지어서 부수기가 어려워 그냥 두었다고 하였다. 원평동에는 이 건물들 외에도 옛 군청 터, 경찰서 건물, 읍사무소 건물, 우편국 건물이 있었을 터인데 아는 사람도 드물고 위치도 변형되어서 찾아볼 길이 없다. 역사가 짧은 도시인만큼 낡고 오래된 것을 없애는데도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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