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305m 높이 4~6m의 작은 토성으로 고려초 팽성호족 평택 임씨 축조설 유력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 24

김해규 한광여고 교사

들판의 연꽃 같은 성(城)

우리학교의 가을은 교실 앞에 길게 늘어선 플라타너스가 알려준다. 올 단풍은 유난히 아름다워서 노랗게 익은 플라타너스는 해질 녘 빨갛게 물든 저녁놀과 황홀한 앙상블을 이룬다. 나는 시험을 며칠 앞둔 3학년 학생들과 창 너머로 지는 황홀한 가을 석양을 감상한다. 사람마다 감상이 다르겠지만 나에게 저녁 노을은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 "하는 가수 전인권의 노래와 함께 감상된다. 그의 노래는 가슴을 뻥 뚫어주는 시원함과 통쾌함이 있어서 들을수록 정감이 간다. 요즘에는 윤도현의 노래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데 감칠맛은 전인권만 못하다.

가을이 한참인 지난 토요일 오후 안정리 농성(農城)을 답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가을걷이가 바쁜 평궁리 들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국도 변에는 코스모스와 억새가 자태를 뽐내고, 단풍나들이에 나선 자동차들이 바삐 남쪽으로 달린다. 객사리 외곽도로를 지나 안정리 초입에서 내리방향으로 우회전하였다. 야트막한 질마재를 너머 2, 3백 미터를 갔더니 먼발치로 농성이 보인다. 평지 위에 봉긋 솟아오른 모습이, 팽성지의 표현처럼 큰 연못 안에 핀 연꽃 같다.

농성주변의 마을들

안정리는 미군부대 앞에 조성된 기지촌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미군부대가 들어서기 전에는 해병대가 주둔했었고, 일제 말에는 일본군의 병참기지와 비행장이 있었다. 그래서 안정리에 가면 오가는 사람들과 상점 간판의 이름들에서 여느 도시와 다른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것만이 안정리의 전부는 아니다. 역사라든가 전통이 끊겼을 것 같은 이 마을에도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던 삶의 흔적들과 문화가 남아있다.

이 곳의 지명이 안정리가 된 것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이다. 본래 이 곳에는 서정자라는 마을과 길마재(안현)라는 마을 그리고 일곱집매라는 마을이 있었다. 서정자는 안정리에서 내리 길로 접어들어 좌측에 제법 큰 마을이고, 길마재는 내리 넘어가는 길마재 고개 밑의 마을이며, 일곱집매는 서정자 마을 서북쪽방향에 있었던 마을이다. 이 중 서정자 마을은 역사가 통일신라 때까지 올라가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팽성지와 대동지지에는 옛부터 이 마을에 오래된 정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예컨데 팽성지에 "옛날 중국사신이 왕래할 때와 우리나라 사신이 중국으로 드나들 때 머무르던 정자가 이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여기서 예부터라는 말은 통일신라시대부터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곳이 통일신라 때 당나라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추정은 신라의 대당 해상교통로였던 당항성이 가까운 남양만에 있었고, 서정자 마을과 가까운 대추리에 혼지나루라는 큰 나루가 있어서 당나라로 가는 나루터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제법 근거가 있다.

서정자가 역사를 간직한 지명(地名)이라면 길마재와 일곱집매는 마을의 형태에 따른 지명이다. "길마"는 "짐을 싣기 위하여 소나 말 등에 안장처럼 얹는 도구"를 말하는데, 이것은 길마재 마을 뒤에 있는 고개의 형상이 길마 없는 말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일곱집매는 본래 이 마을에 일곱 집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평택지방에는 일곱집매 외에도 세집매, 다섯집매 같은 마을 이름이 있는데 모두 같은 의미이다. 입곱집매는 나말여초에 중국 당나라에서 평택지방으로 이주해 온 임팔급이라는 평택 임씨의 시조가 처음 자리잡은 동네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분명치 않다. 농성 주위에는 이 마을들 외에도 성터말이나 신촌 등 다른 마을들이 많다. 하지만 이들 마을은 미군부대와 함께 해방 후 형성된 마을이다. 기존의 마을들도 기지촌 주변의 도시가 형성되고 마을 규모가 커지면서 본래의 공동체의식을 상실했다 이제는 안정리 어느 마을에 가서 마을사람들에게 서정자나 길마재를 물어도 대답할 이 없는 마을이 된 것이다.

임팔급과 평택 임씨

농성(農城)은 많은 의문을 간직한 성곽이다. 이 성곽은 어느 시기에, 누가, 어떤 목적으로 쌓았는가 하는 사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성(農城)이라는 명칭도 "삼국이 전쟁할 때 농민들이 곡식을 거두어 성(城) 가운데 감추어 두기 위해 쌓았다"는 팽성지의 기록에 근거했을 뿐, 이 기록이 사실인지 여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일제가 작성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안정리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토성을 쌓았기 때문에 농성이라고 했다"는 색다른 주장을 소개했는데, 믿기에는 미심쩍은 요소가 너무 많다. 축성(築城)시기에 대한 추정과 성(城)을 쌓은 목적을 판단하는데 방해되는 요인 중에는 성(城)의 전체 둘레가 305m에 불과하다는 것도 큰 역할을 한다. 삼국시대에 산꼭대기에 쌓은 퇴뫼식 산성도 둘레가 보통 6백 미터가 넘는데, 이 성(城)은 평지에 쌓은 성(城)인데도 그보다 절반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수원대학교 박물관에서 1998년에 발간한 "농성유적조사보고서"에는 평택 임씨 문중의 문헌을 근거로 이 가문의 시조인 임팔급이 축성했을 지도 모른다는 재미있는 내용을 소개하였는데 오히려 이 주장이 눈길을 끈다.

그러면 임팔급이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기록에 의하면 그는 당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전란을 피하여 통일신라에 망명하여 안정리에 정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이주했던 나말여초의 시기는 신라도 혼란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팔급은 당나라의 귀족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평택지방의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후손들은 후삼국의 혼란기에 왕건의 편에 가담하면서 고려시대에 대 호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평택 임씨라는 본관을 같게 된 것도 이 시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려 건국 원년 관료조직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29명의 관료 명단 중 평택 임씨가 4명이나 되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사실이라면 고려 초기 평택 임씨는 안정리 주변에 대 전장(田場)과 막대한 노비를 소유한 호족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안정리 주변은 바다와 가깝고 중앙과 멀리 떨어진 변방이어서 도적과 해적들이 들 끊었다. 팽성읍 신대리의 망해산 기슭도 수적(水賊)들의 소굴이었던 적이 있었고, 포승면 원정리의 수도사도 나말여초 수적(水賊)들의 횡포로 절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볼 때 안정리 지역에도 수적들의 손길이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평택 임씨 세력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수단을 강구해야 했을 것이다. 내 추측이 옳다면 농성(農城)은 이 시기에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여름에 농성답사를 함께 했던 서울 서초전자공고의 오세운 선생도 같은 추정을 하였는데, 이 지역에서 평택 임씨 세력 외에는 다른 근거가 없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론이다.

농성을 답사하며

농성은 전체 길이 305m, 높이 4-6m의 작은 토성(土城)이다. 앞서 말했지만 팽성지의 표현대로 평지에 봉긋 솟아오른 모습이 흡사 채 피어나지 않은 연꽃과 같다. 농성(農城)은 조선시대에 성산(城山)으로 불렸다. 성산(城山)이라는 이름은 성(城)이 있는 산(山)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성스러운 산(聖山)이라는 의미로도 불렸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평택현에서는 농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안에 성황당을 두었다. 성황당은 지역이나 마을의 수호신을 제사하기 위해 두었던 것으로, 조선시대 지방의 공적기구(公 ) 가운데 하나여서 매우 신성시하였다. 왜 평택현이 읍의 뒷산인 부용산을 버리고 농성(성산)을 주산으로 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렇지만 나말여초 평택 임씨 세력이 성곽을 축조했다고 추정할 때, 이 시기부터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지역으로 지역민들에게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농성입구는 좁은 마을길이어서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만큼 좁다. 나는 여러 번 답사를 하여서 이제는 수월하게 찾지만 처음 한 두 번은 그냥 지나치고 말았었다. 농성의 남, 서벽 주위에는 2, 30호쯤 되는 마을이 있다. 안내판 앞에 원두막 같은 정자에서 쉬는 노인분들이 있기에 우리를 소개하고 마을 내력을 물었다. 그랬더니 내 짐작대로 이 마을은 해방 후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우리가 만났던 마을 분들은 연세가 70이 넘었는데도 서정자라든가 일곱집매라는 옛 마을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먹고살기 위해 미군부대만 바라보고 이주한 사람들이 마을의 내력이나 전통에 관심을 가졌을 리 없다는 생각을 새삼 가졌다.

농성은 최근 몇 년 동안 복원작업을 하여서 내부도 깨끗했고, 성벽도 잘 정돈되었다. 최근에는 동문지 건너편 경사진 언덕의 잡목과 가시덤풀도 깨끗하게 정돈하여서 시야가 잘 트였다. 성벽에 올라서면 북쪽으로 내리, 동청리, 서쪽으로 객사리 주변, 남쪽으로 서정자 마을과 주변지역이 잘 보인다. 성안에는 본래부터 있었던 소나무 밭을 잘 정돈하여서 가족끼리 돗자리를 하나 들고 소풍을 와도 좋을 만큼 좋다. 너무 잘 정돈된 유적은 자칫 거부감을 주기 쉬운데, 농성도 그런 이미지는 있지만 모든 것이 대체로 긍정적이다. 옛사람과 요즘 사람이 함께 더불어 사는 유적의 이미지를 그리며 성벽을 내려왔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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